지난해 난 두 번에 걸쳐 일본의 구마모토현을 다녀왔다.
우리에게는 웅본이라는 지명으로 더 알려진 구마모토.....
구마모토를 가면 우리 한국인들이 빠짐없이 관광을 하면서 하얀 치아를 드러 내놓고 사진을 찍는 곳이 있다.
지금까지 세번에 걸쳐 간 곳이 바로 구마모토성이다. 일본의 3대성이라 불리는 난공불락의 성이 바로 구마모토성이다.
일본의 3대 성이라 하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사카성, 나고야성, 그리고 바로 구마모토성이다.
구마모토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후 그의 오른팔과 같았던 가토기요마사(가등청정)라는 인물이 쌓은 성이다. 가토기요마사는 정유재란 당시 조선에서의 마지막을 울산에서 보냈다. 울산성 전투는 1차와 2차에 걸쳐 진행 되었는데, 1차 전투에서 조명연합군과 왜군은 서로 약 1만 5천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가토기요마사는 겨우 5백명의 왜군을 이끌고 울산왜성과 서생포왜성으로 수퇴하여 수성전을 전개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이 왜의 조총에 맞서 엄청나게 많은 왜군을 살상한 것은 성으로 흐르는 모든 수로와 수맥을 차단하였기 때문에 성에는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고전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으로 돌아온 가토기요마사는 구마모토성을 축성할 때 그곳에 120개의 우물을 팠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많은 조선 양민들을 왜로 끌고가 노예로 삼아 구마모토성을 쌓는데 동원을 하였다는 것이다.
아직도 이곳에는 울산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 살고 있는 마을이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자장가가 있는데, 그 자장가가 불려졌던 곳도 바로 熊本縣 球磨郡 五木村에 전해오는 노래입니다.
이 자장가는 이츠키자장가라 하여 일본에서 가장 잘 알려지고 많이 부르는 자장가인데, 뭔가 가사가 너무 서글프고 한탄하는 곡조가 깔려 있습니다. 그 가사는 여러 개가 전승되고 있는데, 괄호를 참고해주시구요.
(참고 http://blog.naver.com/ebisu03?direct=Log&logNo=40069003374,
http://www.kumamotokokufu-h.ed.jp/kumamoto/shoukai/ituki_kas.html)
그런데 저와 절친한 한 일본인 학자가 이 자장가는 일본의 전통민요가 아니라고 저에게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 분은 아마도 조선에서 끌려 온 한국의 여성이 부른 노래라고 단정지었지요. 그 이유는 가사를 잘 살펴보고 앞뒤 논리적 근거를 생각하면 결코 일본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녀는 전라남도의 남해안의 여수나 그 부근에 살던 여성이 부른 것이라고 추정을 했습니다. 가사 마지막에 동백꽃이 나오거든요.
하여간 구마모토라는 지역의 한국관계는 대단히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마모토의 지명을 보면 뭔가 느껴지지 않나요?
제가 공주에서 공부를 할 때 공주를 고마나루라 불렀고, 공주시내 곳곳은 네 마리의 곰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마나루에 가면 곰을 모신 사당도 있습니다. 고마와 구마, 어원이 같다는 것을 누구나 쉽게 알수있지요? 그래서 공주대학교와 구마모토대학이 자매결연을 맺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삼국시대 이전 한국의 고대어에는 종성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다고 합니다. 즉 지금의 일본어가 오히려 더 한국적인지 모른다는 이야기이지요. 한국은 신라의 삼국통일로 많은 것들이 중국화 되어 버렸지요. 성씨부터 언어까지....그래서 한국어의 80% 이상이 인정하기 싫지만 중국의 한자어라는 것은 사실이지요.
일본은 어떨까요? 제 소견으로는 오히려 일본이 성씨라든가 다양한 문화에 있어 더 고대의 한국적인 것은 아닐까요?
고대어인 고마가 한국은 곰으로, 일본은 아직도 구마로 그 언어가 살아 있는 것만 봐도요.
하여간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부분은 조선인들의 피를 빨아 건설한 구마모토에서는 하얀 치아를 드러 내놓고 웃으며 사진을 찍으면서 그곳에서 30분이면 가는 백제인들의 한이 서려있는 기구지성은 방문을 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그분은 백제가 멸망하자 왜로 건너가 그곳에서 나당군의 침입에 대비해 많은 성을 쌓는 중책을 담당합니다.
바로 구마모토 기구지시에 있는 이성이 바로 그분의 작품인데 지금은 그 흔적만 있습니다.
제가 한 신혼부부를 만나 이러한 이야기를 하자 그들도 가고 싶다고 하여 알려주었습니다.
기구지성은 지난 67년부터 발굴하기 시작하였는데, 30여 차례의 발굴을 통해 이 성이 바로 백제계 산성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이곳에서 발견 된 것은 팔각형과 십이각형의 대형건물지가 십여동 발견되었고, 목간괌 가새 및 농경도구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옆의 그림이 기구지성의 안내도입니다.
산성의 입구에는 온고창생관(溫故創生館)과 온고창생비(溫故創生碑)가 세워져 있습니다. 온고창생비의 여러 인물 중 특히 주목되는 분이 한 분 계십니다.
제가 삼국시대 인물 중 참 좋아하는 분이 있습니다. 백제의 귀족인 억례복류라는 분입니다.
그분이 백제의 많은 성을 쌓을 때 지휘를 하시던 분입니다.
의자에 앉아 뭔가를 지시하고 계시는 분이 백제 귀족 억례복류 대신입니다. 기꾸지 성은 후쿠오카 태재부시와 오노조시에 있는 수성과 대야성을 지원하기 위한 후방 병참기지였습니다.
안내판에는 명확하게 백제의 귀족 억례복류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들 산성은 왜가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참전했던 663년 이후에 축성을 한 것입니다. 기꾸지성에 오르면 한눈에 드넓은 기구지의 기름진 들판을 볼 수 있다. 기꾸지성은 해발 145m의 낮은 산지에 쌓은 테머리식 산성이지만 정상은 평평합니다. 이곳의 규모는 둘레가 3.5km로 그 면적이 55ha에 이른다고 한다.
기구지성에서 발굴된 팔각형의 건물지 옆에 복원한 건물입니다. 이 건물은 고루(鼓樓)로 알려진 것입니다. 즉 유사시 북을 울려 상황을 알려주었던 것이겠지요. 일설에 의하면 이 북은 낙랑의 자명고처럼 스스로 울렸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기구지 성에서 발굴된 팔각형의 고루는 일본 고대 산성 가운데 유일하다고 합니다.
옆과 같이 일본의 기구지 성에는 많은 건물지드이 발굴되었는데, 이 대형건물지들이 바로 쌀과 전쟁물자를 비축해두었던 창고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병사들이 머물렀던 막사도 있었다고 합니다.
저에게 가장 관심을 끌게 해주었던 기념식수였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구마모토성은 일본의 3대 성으로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구마모토성에 일왕이 방문하지 않고 바로 이곳 기구지 성을 방문했다는 것과 기념식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왜 일왕부처는 아주 시골인 이곳을 방문하였을까요?
그리고 그들은 왜 이곳에 식수를 하였을까요?
일왕이 이곳을 방문한 해는 평성 11년 10월 24일이니까 서기로 말하면 1999년 10월 24일이네요.
정확히 10년 후에 제가 이곳을 방문한 것이 되었지요.
이유는 단 하나라고 생각을 합니다.
바로 현 천황의 계보가 바로 백제계이기 때문입니다.
이 나무가 일왕부처가 기념으로 심은 나무입니다.
웬지 일왕과 친근함이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백제계임을 스스로 알려주고 있다는 반도주신의 자부심이라고 할까요.
우리가 일본에게 문화를 전파한 자부심......
솔직히 저의 마음은 그렇습니다.
앞의 한국과 일본의 카르마을 읽으시면 저의 위의 질문에 답이 될 것입니다.
조금 아쉬운 것은 후쿠오카 태재부시를 갔을 때 오노조성과 수성을 내려서 보니 못한 것이 한이 되네요.
많은 분들을 모시고 갔다오다보니....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차 공간의 문제가 있어서 내리질 못하고 말았습니다.
후쿠오카 태재부 부근으로 가면 안내판에 大野城이라는 간판과 水城이라 쓰여진 안내표지판을 볼 수 있으며, 수성은 지금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아래의 글은 일본 역사공원 기구지성을 소개한 글입니다. 본인의 의도와는 무관하며 단지 소개한 내용만 그대로 옮겨 놓았습니다.
鞠智城は、東アジア情勢が緊迫した7世紀後半(約1300年前)に、大和朝廷(政権)が築いた山城です。
663年の「白村江(はくすきのえ)の戦い」で唐・新羅の連合軍に大敗した大和朝廷(政権)が日本列島への侵攻に備え西日本各地に築いた城の一つで、九州を統治していた大宰府やそれを守るための大野城・基肄(きい)城に武器・食糧を補給する支援基地でした。『続日本紀(しょくにほんぎ)』など、国の歴史書にも記載のある全国有数の重要遺跡として、平成16年2月27日に国史跡に指定されました。
周囲の長さ3.5km、面積55haの規模をもつ城で、昭和42年度からの県の発掘調査により、八角形建物跡をはじめとする72棟の建物跡や、貯水池跡、土塁跡など、当時の姿を物語る貴重な遺構が相次いで発見されています。
こうした発掘調査の成果に基づき、平成6年度から4棟の復元建物(八角形鼓楼、米倉、兵舎・板倉)をはじめ、城の立地や規模、構造などを体験的に学習できる歴史公園として整備を進めています。
ガイダンス施設「温故創生館」では、展示や映像により、鞠智城の歴史や構造について詳しく学ぶことができます。
아래 글이 바로 일본의 자장가로 알려진 이츠키자장가의 내용입니다.
伝承者 三浦一雄 |
ねんねしなされ 早起(はやお)けなされ 朝は六時にゃ(お寺の)鐘(かね)が鳴る おどま盆(ぼん)ぎり盆ぎり 盆から先ゃおらんと 盆が早よくりゃ 早よもどる おどまくゎんじんくゎんじん ぐゎんがら打(う)てさるく ちょかでままたゃて ろにとまる おどんが打死(うちん)ちゅうて 誰(だい)が泣(に)ゃてくりゃか 裏の松やみゃ せみが鳴く せみじゃござらぬ 妹でござる 妹泣くなよ 気にかかる 花は何の花 つんつん椿 水は天から もらい水 おどんが打死んだら おかん端(ばちゃ) いけろ 人の通る数 花もらう |
伝承者 吉松 保 |
おどま盆ぎり盆ぎり 盆から先ゃおらんと 盆が早よくりゃ 早よもどる おどまかんじんかんじん あん人たちゃよか衆(し) よか衆ゃよかおび よか着物(きもん) おどんが打死だときゃ 誰が泣(に)ゃてくりゅか 裏の松山ゃ せみが鳴く せみじゃござらぬ 妹(いもと)でござる 妹泣くなよ 気にかかる おどんが死んだなら 道端(みちばち)ゃいけろ ひとの通るごち 花あげる 辛(つら)いもんだな 他人の飯(めし)は 煮(に)えちゃおれども のどにたつ |
伝承者 川辺 みゆき |
おどまいやいや 泣く子の守にゃ 泣くといわれて 憎(にく)まれる 泣くといわれて 憎まれる おどんま盆ぎり盆ぎり 盆から先ゃおらんと 盆が早よくりゃ 早よもどる 盆が早よくりゃ 早よもどる 花は何の花 つんつん椿 水は天から もらい水 水は天から もらい水 |
伝承者 堂坂 よしこ |
おどまいやいや 泣く子の守にゃ 泣くとゆわれて 憎まれる 泣くとゆわれて 憎まれる ねんねした子の かわいさむぞさ 起きて泣く子の 面憎さ 起きて泣く子の 面憎さ おどんがお父つぁんな あの山ゃおらす おらすと思えば 行こごたる おらすと思えば 行こごたる |
伝承者 中園 スナ(故人) |
おどま盆ぎり盆ぎり 盆から先ゃおらんと 盆が早よくりゃ 早よもどる 盆が早よくりゃ 早よもどる ねんねした子の かわいさむぞさ 起きて泣く子の 面憎さ 起きて泣く子の 面憎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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