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읍성을 걷다
고창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통폐합 이전에 3개의 군이 있었습니다.
고창군, 흥덕군, 무장군 이렇게 세 개였는데, 1914년 이 세 곳을 통폐합하여 고창군이라 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이 중 가장 큰 군이 무장군이었고, 다음이 흥덕군이었죠. 고창군은 가장 작았구요.
군세를 보더라도 무장군은 2급지, 흥덕군은 3급지, 고창군은 4급지였어요.
무장군은 세종 15가 일거예요.
1415년 인근의 무송현과 장사현을 통합하면서 무장군이라는 지명을 얻게 된 거죠.
조선전기와 고려말은 왜구가 우리 해안에 자주 침범하여 식량을 수탈해 가던 시기였죠.
그래서 조정은 이를 막기 위하여 해안가에 읍성을 축조하게 됩니다.
이러한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성이 무장읍성이예요.
몇년간의 노력으로 무장읍성은 조금씩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지요.
위는 지난 5월의 사진이고 아래는 올 4월 중순의 사진이예요.
입구의 진무루인데요,
정비가 잘 이루어져 있어요.
성벽도 거의 복원이 이루어졌구요,
아이들이 무장읍성을 공격해보는 놀이도 해보는데
참 신나게 놀지요.
조금 올르다가 덜어져도 아래는 잔디라 위험이 거의 없네요.
진무루 앞의 성벽에 수구도 보이네요.
수구는 물이 빠져 나가는 곳으로 성의 비밀통로가 되기도 하지요.
잘 복원된 우물도 있어요.
성에 물이 없으면 버틸 수가 없겠죠.
이렇게 여러 건물들이 하나씩 복원되고 있어서 무장읍성을 찾는 관광객들이 한둘씩 늘고 있어요.
특히 이곳은 동학농민혁명과 깊은 연관이 있어 동학의 숭고한 민족정신을 느끼고자 한다면 반듯이 이곳은 방문해야 할 듯하네요.
무장읍성의 읍취루예요.
읍취루는 1502년 무장현감인 최검이라는 분이 복원을 했다고 전하는데, 이것을 다시 복원한 거죠.
읍취는 취를 높이 받들어 귀하게 여긴다는 의미인데, 취는 비취색을 뜻한은 것 같아요.
즉, 푸르름을 귀하게 연긴다는 뜻이니 청백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읍취루를 만들고 이곳에서 전라감사를 모시고 백일장을 열었는데,
그때 장원한 이가 박수량이라는 인물이라고 해요.'
박수량은 조선시대 최고의 청백리로 알려진 인물인데요, 부인이 부송유씨랍니다.
송사지관에 오르는 계단입니다.
계단이나 축대에 새겨 놓은 조각을 보세요.
화병에 국화도 꽃아 놓고요.
이곳은 무장읍성의 비석들이랍니다.
이 비석들은 청백리나 현을 위해 노력하신 현감들 또는 감사들을 기념한 비석인데
쩝 아쉽게도 이 비가 사실이 아닌가봐요.
이 비는 정권이라는 현감의 비인데요,
아래 기단석을 보세요.
비꼬은 듯한 얼굴의 거북인지 사람인지.
우습지요?
왜 이렇게 했을까요?
정권 현감이 통치를 잘해서 그랬을까요?
이 비는 쇠비인데, 그리 흔한 비는 아니예요.
광산김씨인 김연곤 참봉의 선덕비니요.
객사는 송사지관인데 송은 무송의 송, 사는 장사의 사를 따서 지은거랍니다.
관원이 쉬고 가는 곳이지요. 가운데는 임금님의 전패를 모신 곳이구요.
취백당은 동헌이랍니다.
현감이 집무를 보는 곳이지요.
취백당도 의미는 청백리를 상징하는 것 같아요
입구인 진무루에 신숙주의 시가 있어요.
신숙주는 처가가 고창이예요.
공은 집현전의 대학자로 한글을 창제하죠.
비록 사육신이나 생육신을 되지 못했지만 우리 민족문화를 융성하게 하신 분으로 한글을 창제하는데 공로가 가장 큽니다.
부인은 무송윤씨로 이곳 고창의 무송윤씨가로 장가를 오거든요.
처남이 한명회와 더불어 세조 때의 신하인 윤자운이고요,
윤자운의 할아버지가 거위를 살린 윤회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