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과 주류성 산행
가족과 함께하는 즐거운 부안 주류성 여행
난 늘 부여와 주류성이라는 단어만 접하면 가슴이 뛴다.
고창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지만 아이들과 함께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내는 원래 산을 잘 타는 편이 아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막내는 내가 목마를 태워서 가야 하기 때문이다.
막내 녀석은 잘 걸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더 힘들다.
주류성의 산행코스는 개암사 앞의 개암저수지 앞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가야한다.
그곳에서 이삼백m를 걸어가면 주류성 일부 개축된 곳을 만나게 되고, 그 곳을 지나면 안내판도 없는 산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산속을 따라가면 남장대로 추정되는 곳이 나오게 되는데, 그 입구를 찾는다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은 아니다.
이곳의 지리를 잘 모르는 사람은 결코 찾을 수 없는 산길이다.
하여간 남문지를 지나 50m정도 걸으면 길 왼쪽으로 약 50-70cm정도 높이의 산속으로 난 길을 만나게 된다.
지금은 산행이 그리 많지 않아 찾기가 더욱 어렵다.
산길로 접어들어 계속 오르다보면 무너진 성벽과 넓은 성채를 볼 수 있다.
그곳에는 평탄한 지형이 있고, 그 위에는 성채를 만들었던 돌들이 흩트려져 있지만, 누가 봐도 그곳이 과거에 무엇인가 있었던 곳임을 금방 알 수 있다.
그곳이 바로 남장대로 추정되는 곳이다.
추정 남장대에 올라 남문지부터 개암저수지까지의 협곡이 한 눈에 볼 수 있으며, 일부 사산저수지 주변의 경관도 볼 수 있다.
남장대를 따라 무너진 성벽을 따라 30-40분 계속 오르면 원형이 그런대로 보존된 주류성의 성벽을 볼 수 있다.
이곳의 전면에는 장밭들, 사산산성, 소산리산성, 유정재와 멀리 부안진성, 부곡리산성, 금사동산성, 두승산성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후면으로는 지금 공군기지지만, 통일신라시대에는 백강전쟁이 끝나고, 의상대사가 원효대사와 사복스님 등과 더불어 이곳에서 전쟁으로 죽은 원혼을 달래고, 주민들에게 설법을 한 후, 공군기지에서 수행을 했던 의상대가 보인다.
이곳을 지나 바로 앞에는 커다란 바위가 주류성의 정상이자 뭔가 비밀스런 것이 숨겨진 느낌을 받는 우금암이다.
우금암을 따라 계속 가게 되면 길은 없다. 다시 아래로 내려와 중간의 등산로를 따라 가야 제대로 갈 수 있다.
이 등산로가 끝나면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으로는 추정 북문지와 북장대 방향이고, 왼쪽으로 가면 베틀굴과 복신굴을 볼 수 있다.
베틀굴은 백제 풍왕 당시 이곳에서 백제의 여인들이 베를 만들던 곳이라 전하고 있다.
이곳의 굴은 그리 넓거나 크지는 않다. 그러나 아내와 아이들은 처음 와보니 신기하기도 해서 그런지 매우 즐거워한다.
베틀굴 바로 위로 가면 주류성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바위의 정상을 오를 수 있다.
단 이 바위를 오를 구두는 삼가야 한다. 계속 바위를 돌아가면 또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에서 잠시 헷갈릴 수 있으니 조심하길 바란다.
보통 이 지방에서 시누대라 부는 작은 대나무들이 있는 곳인데,
그곳에서 왼쪽의 오솔길로 따라가면 바로 삼국사기와 구당서에 나오는 복신굴이 나온다.
이 복신굴에서 복신장군이 풍왕에게 잡혀 살해당한 그 현장이다.
그곳에는 많은 등산객들이 있었다. 산행 온 여행객들에게 이곳이 어떤 곳인지 물어보았더니, 원효방이라고 말했다.
원효방은 맞는데, 왜 원효는 이곳 전라도까지 왔을까?
경상도에는 수도할 곳이 없어서 일까? 많은 등산객들에게, 이곳의 역사와 전설을 이야기해주니 고맙다고 한다.
역사의 현장은 눈으로 보는 것보다는 마음으로 보고 느끼는 것이 필요하다.
역사는 지나 간 과거이기 때문에 눈으로만 보려면 안 보인다.
우리 학자들처럼 문헌으로 볼 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한계다.
유물과 유적은 어떨까? 그것도 그 시대를 읽기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나 금동대향로를 보고, 백제의 문화를 말하는 것도 쑥스럽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서민들이 쓰는 것이 아닌 특별한 물품을 보고, 그것이 우리 문화라고 한다면 동의를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난 금동대향로를 보면서 감탄을 하고, 그 아름다움을 창조한 백제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향로로서 누구나 쓰는 물건이 아니었다.
일본의 정창원에 가득한 삼국의 일반적인 살아있는 생활용품을 보고 싶다.
정창원은 동대사에 왕실의 유물창고다.
일본에서 1년에 한 번 정창원 특별전을 하는데, 그때 보여주는 물품이 100개라고 한다.
정창원의 물품을 이렇게 공개를 한다면 아마 90년은 더 걸린다고 한다.
복신굴에서 최소한 경건하게 백제부흥전쟁을 하면서 죽은 모든 이에게 잠시 고개를 숙여봄은 어떨런지!
복신굴 아래로 가면 개암사가 나온다.
개암사는 634년(무왕 35) 백제의 묘련(妙漣)이 창건하고, 신라의 삼국통일 후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676년에 중수하였다고 전한다.
개암사는 절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백제의 유물들을 볼 수 있다. 먼저 대웅전 뜰 앞에 오래된 돌들이 있다.
대웅전 바로 앞에는 사각형에 중앙이 움푹 파인 부도(50cm*50cm40cm)가 있다.
이 부도는 634년 묘암골에 묘련왕사가 창건한 묘련암사가 있다.
이곳은 백제 풍왕 당시 백제군을 훈련시키던 곳으로 추정이 되는 곳이다.
바로 이 부도를 묘련암사에서 발견하여 이곳 개암사로 옮긴 것이다.
개암사 대웅전 석축 아래에는 두 개의 구시를 볼 수 있다. 일명 돌절구통으로 우금암의 복신굴 밑 옥천암터에서 1960년 발견하여 이를 개암사로 옮겨 놓아 보관하고 있는 중이다.
구시의 길이는 약 110cm로 상당히 크다. 구시의 전면에는 뭔가 한자가 새겨 있는데, 차후에 탁본을 통해 한자가 해독되어야 한다.
개암사 본전 마당에 설치된 당간지주도 눈여겨 볼만한 유물이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사산저수지의 조손샘터에서 발견되었는데, 당간지주를 백제의 석공들이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 김제의 벽골제에 있는 장생거도 이곳에서 1962년 발견되었다가 옮겨진 것이라 한다.
짧은 아이들과의 답사를 마치고 허기진 배를 채우고자 민가 근처에 자리를 잡고, 떡과 과자를 꺼내 먹고 라면을 끓여 먹었다.
야외에서 이렇게 먹는 라면은 그 어떤 것보다도 맛있고 재미있는 추억으로 남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