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이야기(三国の歴史)

백제와 왜! 결맹암을 아십니까?

백강 문정사랑 2010. 7. 11. 01:10

백제와 왜.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쉬우면서도 어렵다는 생각이든다.

어렵다는 것은 역사서나 고고학적 자료가 나오지 않으면 진실이 아니고, 역사도 아니라는 개념이 학자들 사이에 깊이 박혀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반인들이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정사나 고고학적 자료의 한계로 인해 쉽지 않은 일이다.

이말은 역사나 고고학을 하는 고고하신 분들이 하는 일들이 역사라는 학문이다.

특히 한국의 사학계나 학계는 중국의 중화주의 깊은 수렁에 빠져 지금까지 수렁에 빠져 나오지 못하더만, 일제를 거치면서는 일제의 장막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중국의 정사나 삼국사기와 같은 중화주의 역사관을 가진 것을 정사라 신앙하고 있고, 그 외 것은 가당하지도 않은 잡문에 불과하다.   

그러니 원사나 흠정만주원류고 같은 북방민족의 정통 정사는 역사에도 끼지도 못하는 잡것들의 역사서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백제인 태안만려가 쓴 일본서기나 고서기는 역사도 아닌 쓰레기가 아니고 무엇이랴?

일본서기! 우리가 그렇게도 미워하는 일본서기의 일부 편년이 백제를 너무도 정확하게 연대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특히 무령왕릉의 출토를 통해 일본서기의 연대의 정확성에 우리 학계가 놀라지 않았던가?

하여간 일본서기를 한 번 정독한 일본인 아내 놀라며 일본서기가 왜 이렇게까지 백제사를 많이 기술한지 이해가 안된다는 말을 하였다.

답은 뻔하다. 개로왕과 의자왕 이후 수십만의 백제인들이 미개한 일본에 정치세력화 하면서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면서 기록을 했으니 당연한 것이 아니겠냐고....

그리고 쫒겨간 백제인들과 가야인들이 역사를 어떻게 기술하겠는가?

무엇보다도 백강전쟁 후 본토를 잃어버린 백제인들이 새롭게 역사 기술을 하는데, 어떻게 해야하는지 당시의 백제인들의 눈으로 상황을 인식하면 답은 나올 것이다. 

하긴 이러한 이야기는 역사서에 없으니 믿은 만한 것은 못된다.

 

하여간 하고 싶은 말은 백제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근초고왕 당시 이야기이다. 

<왜의 전권대사로 백제인 木羅斤資와 沙沙奴跪이 왜병을 거느리고 신라를 격파하고, 경상도 서부지역의 7국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말머리를 돌려 탐라를 격파하여 제주도까지 백제의 영토를 확장시켰다. 이에 근초고왕과 왕자 貴須(후에 近仇首王)가 군사를 이끌고 가자 전라도의 比利(完山), 辟中(金堤), 布彌支(미정), 半古(羅州)의 四邑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이리하여 근초고왕과 귀수 부자, 荒田別, 목라근자 등이 주류성의 주류시에서 만남을 가졌다. 얼마 후 왜장 千熊長彦과 近肖古王은 먼저 백제 땅이 된 辟支山(김제 성산)올라 맹세를 하고, 또 古沙山(古阜)에 올라가 맹세를 하였다고 한다. 그때 근초고왕이 다음과 같이 맹세하였다. “만일 풀을 깔고 앉으면, 불에 탈 위험이 있다. 또 나무를 잡고 앉으면, 물에 흘러갈 위험이 있다. 고로 반석 위에서 맹세를 하면 영원히 썩지 않을 것이다. 금후 천추만세에 끊임없이 무궁할 것이다. 항상 西蕃이라 칭하여, 춘추에 조공하리라”라고 하였다는 기록이다.(神功皇后 49年 春 3月)>

 

아주 기분 나쁜 기록이다. 아니 왜의 신공황후가 백제와 함께 마한을 정복하고 벽지산과 고사성에 올라 맹세를 하였다는 이야기다. 하여간 하긴 했나보다. 당시 왜에서 전북의 김제와 고부를 알고 기록하였으니.....

이 내용을 읽고 왜와 백제가 서로 결맹을 한 곳을 찾고 싶었다.

전 개암사 주지이셨던 효산스님과 만나 여러 이야기를 하고 있던 중 결맹암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효산스님은 약간은 화난 듯 웃으시는 듯 하면서 <예전에 고부 두승산에 절에 길을 만들면서 결맹암이라 전하는 바위를 파괴를 했다>는 내용의 말씀을 해주셨다.

나는 바로 다음날 고부 두승산으로 갔다. 보고 싶었다. 백제와 왜의 결맹암을.....

근초고왕의 눈으로 마한을 정복한 후 그 광경을 보고 느끼고 싶었다.

먼저 두승사를 갔다. 너무 낮았고 암석을 깨면서 도로를 낼 정도의 절은 아니었다. 

다음으로 유선사를 갔다.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가다가 중간중간 부서진 돌들을 보면서 혹시 이곳이 아닐까? 저곳이 아닐까 하는 고민을 하면서 열심히 산으로 산으로 올라갔다. 효산스님이 길을 내면서 일부 파괴했다는 말씀이 머리에  있었기 때문에 가다가 차를 세워 걸어서 올라갔다. 

아무리 가도 될 만한 공간이 없었다. 가다보니 어느새 유선사에 닿아 그곳 스님이 저녁식사를 함께 하자고 하여 밥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유선사의 동종을 세운 그 자리가 대대로 결맹암이라 내려온 자리라 한다.

너무 기쁜 나머지 얼른 밥을 먹고 종이 있는 곳으로 갔다.

넓은 암석 위에 세운 종각을 볼 수 있었다. 일천육백년 전 근초고왕의 웅대한 꿈과 기쁨을 느껴보았다. 

 

 종각 아래는 효산스님 말씀처럼 길을 만들면서 암석을 깬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아쉬운 것은 정읍시청에서 이러한 사실에 대한 안내판 하나 세우지 않고 있다는 것이 더욱 마음이 아팠다.

 

 대웅전을 오르는 길로 위가 바로 백제의 근초고왕과 왜사신이 함께 결맹을 한 장소라 전하는 곳이다.

 

 결맹암 부근에서 바라본 북쪽의 김제와 정읍시, 그리고 부안군 일부다.

전면이 백제 중방의 하나였던 고사비성으로 추정되는 영원면 은선리토성과 금사동산성이다.

신라가 백제를 점령한 뒤 고부면소재지로 행정치소를 옮겼으리라 추정된다. 

주변에는 장문리 석탑과 은선리석탑 등 백제계 석탑이 존재한다.  

  

이곳은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해발 443m의 두승산 산봉우리를 에워 싼 산성으로, 성 안에 골짜기를 품고 있는 포곡식 산성이다. 승고산성 또는 영주산성이라고도 한다.

9개의 봉우리를 이룬 천연의 절벽을 이용하여 쌓은 성벽은 둘레가 500m가 넘으며,

성 안에는 서쪽과 남쪽의 두 골짜기가 있다.

현재 성의 대부분이 무너져 내렸으나, 옛날 모습이 약간 남아있으며,

골짜기를 품고 있는 서쪽과 남쪽에는 문터가 남아 있다.

성이 지어진 연대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성 안에서 발견되는 유물들로 보아 삼국시대 백제가 쌓아서 계속 사용해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새로운 한일 간의 관계정립의 때가 도래 한 것 같다.

1600년 전 백제의 근초고왕과 왜는 이곳 전라도 고부 고사성에 올라 이렇게 회맹하지 않았던가?

이제는 한일 간도 결자해지의 정신이 필요한 때가 된 것이다.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대주신의 위대한 한민족이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