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포(濟安浦)
제안포라는 지명을 통해 기본적인 의미를 살펴봅시다. 우리말의 지명이라는 것은 돌연히 생기거나 어느 한 개인이 갑자기 명명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경우보다는 토착 원주민들의 생활의 반영어이며, 사상의 표현이라는 역사성을 가집니다. 제안포라는 지명도 우리 선조들의 염원을 담은 사상의 표현일 것입니다. 제안포를 한자의미 그대로 이해를 하면, 편안하게 건너가는 포구라고나 해야 할까요? 부안과 고창의 서해안이 항해하기 힘이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지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더 본질적인 것은 역사성, 즉 부안을 중심으로 한 백제의 역사 속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줄포만의 낙조(줄포자연생태공원 앞에서)
제안포라는 이름이 등장하고 있는 기록은 고려초기의 기록입니다.
『文獻備考』與地考 21 관방 9 海防 3 扶安條에 의하면 “濟安浦 在南50里 卽興德縣沙津浦下流 其下黔毛浦 又爲玉浦 西達大海 高麗初濟安”제안포는 현의 남쪽 50리에 있다. 즉 흥덕현 사진포의 하류에 있으며, 그 아래 검모포가 있으며, 또한 옥포를 만들고, 서쪽의 바다에 이른다. 고려초에 제안포라 불렀다.
고려 초는 통일신라의 영향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명도 큰 변화 없이 그대로 유지 존속시켰을 것입니다. 제안이라는 의미가 위에서 언급한 봐와 같이 편안하게 건너다는 라는 뜻일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줄포만을 중심으로 한 지명들을 살펴보면 뭔가 공통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백제시대 보안과 줄포 일대를 흔량매현(欣良買縣), 통일신라시대에는 희안(喜安), 고려시대에는 보안(保安)이라 하고 별호로 낭주(浪州)라 불렀습니다.
흔양매현은 흰내 말이라는 뜻으로 하얀 물의 마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자 희안이라 불렀습니다. 편안해져서 기쁘다. 무슨 의미일까요. 희는 하얗다는 의미도 있겠네요. 흰 곳을 편안하게 했다는 의미인가 봅니다. 그럼 희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그것이 바로 백촌강은 아닐까요? 백촌의 백이 하얗다는 의미이니까요? 고려시대 보안으로 바뀌고 별호로 유랑하는 고을이라는 뜻의 낭주로 불렀네요. 편안하게 보호하였다. 보안면 사창은 고려초 제안포(濟安浦)라 불렀습니다.
제안포는 전혀 다른데 왜 제안포라고 했을가요? 그냥 건너다는 뜻의 제일까요?
부안의 또 다른 고을은 부안을 중심으로 한 일부를 백제시대에는 개화현(皆火縣), 통일신라시대에는 부령(扶寧) 또는 계발(戒發)이라고 하여 고려시대까지 불렸습니다. 갑자기 개화에서 부령으로 지명이 바뀌었습니다. 도울 부로 그냥 해석하면 되나요?
삼국사기 잡지 지리지 고사주를 보면, 고사주(古四州, 현 정읍 고부)는
본래 고사부리(古沙夫里, 정읍 고부)로서 5현(縣)이 있습니다.
평왜현(平倭縣, 정읍 고부)은 본래 고사부촌(古沙夫村, 정읍 고부)이었습니다. 대산현(帶山縣, 정읍 칠보 추정)은 본래 대시산(大尸山)이었습니다. 벽성현(辟城縣, 김제)은 본래 벽골(辟骨, 김제)이었습니다. 좌찬현(佐贊縣, 고창 흥덕)은 본래 상두(上杜, 고창 흥덕)였습니다. 순모현(淳牟縣, 김제 만경)은 본래 두나지(豆奈只, 김제 만경)였습니다.
『古四州 本古沙夫里 五縣 平倭縣 本古沙夫村 帶山縣 本大尸山 辟城縣 本辟骨 佐贊縣 本上杜 淳牟縣 本豆奈只』
고려시대 고부지방을 갑자기 평왜현으로 불립니다. 왜를 평정했다. 이해가 안갑니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 선생이 1075년 태어나 1151년에 졸하셨습니다.
왜구가 우리나라를 노략질 한 것은 대체로 13세기 ~ 16세기입니다. 왜구의 활동이 가장 활발한 시기가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입니다. 왜구의 침입으로 고려가 멸망하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왜구가 고려나 중국의 해안가를 노략질 하게 된 것은 2차에 걸친 여몽 연합군의 일본 정벌과 내란으로 몰락한 무사와 농민들이 노예와 미곡을 약탈할 목적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왜구가 처음 침입한 시기가 1223년(고종 10)입니다.
김부식선생이 삼국사기를 기술할 때는 왜구가 고려를 공격할 시기가 아니라는 점이지요.
그런데 고려는 왜 고부를 평왜현이라 불렀을까요? 백제시대는 부안과 정읍은 백제의 5방 중 하나인
고사부리의 속현이었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대목입니다.
고사부리에 속한 이 땅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이곳을 평왜현이라 불렀을까요?
하여간 이곳 부안지방의 지명들이 한결같이 濟나 喜를 앞에 놓고, 뒤에 편안해졌다(安)라는 의미나 평정했다(寧)는 한자를 썼습니다. 그리고 백제와 가장 가깝게 교류를 한 왜의 명칭이 이웃 고부에 한 현의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결론을 말하고자 합니다.
제(濟)는 백제를 뜻합니다.
희(喜)는 백강 또는 백촌강을 의미합니다.
왜(倭)는 왜국 또는 일본을 뜻합니다.
부(扶)는 부여를 뜻합니다.
부여라는 지금의 충남의 작은 소도읍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만주에서부터 쫓겨 내려온 부여족을 말합니다.
부여는 만주에서 북부여, 동부여, 부여 등 많은 나라를 만들면서 남하를 합니다.
결국 백제 성왕 때는 남부여라는 공식명칭을 쓰지요. 그리고 그 수도가 지금의 충남 부여가 됩니다.
저 멀리 만주벌판을 휩쓸 던 그 유대한 민족이 바로 예맥족의 후손인 부여인들 입니다.
바로 백제의 마지막 왕성인 주류성과 백촌강전투에서 처절히 싸우다 열도로 쫓겨난 부여인들을 의미하는
자가 바로 부(扶)자입니다.
지긋지긋한 백제인들을 일본열도로 몰아내고 승리한 신라인들에게 이곳 부안은 최후의 승리의 땅이지만, 이 땅을 얻기 위한 대가는 처절한 민중들의 죽음의 결정체였습니다.
백촌강과 주류성의 승리를 통해 이들이 한 것은 흔량매현도 개화도 아닌 다른 지명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백제를 도와 참여한 민중들은 온데간데 없고, 신라를 궁지로 몰아넣었던 철천지원수 백제에 대한 증오와 악으로 백제의 마지막 왕성인 부안 땅의 풀 한 포기 하나 가만히 놓아 둘 수가 없었던 사람이 바로 김법민(신라의 문무왕)이었습니다.
그래서 흔양매현과 고사부리, 개화는 잃어버린 영화와 같이 쓸쓸한 승리자 신라의 이름만 남아 희안, 제안, 부령, 평왜현, 부안, 보안 만이 남아졌던 것입니다.
백촌강의 백제군을 몰아내니 편안하게 되었다. 백제지역을 점령하니 편안했졌다. 부여국을 평정하니 편안해졌다. 왜국을 평정한 현이다. 부안은 부령과 보안을 합쳐 부안이라 했는데, 의미는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부여국을 점령하니 평안해졌다. 보안은 백제로부터 편안하게 보호했다. 이렇게 해석하니 다 통하네요.
주류성의 흔적이 갑자기 등장하게 되는데, 그 지명이 바로 주류포인 줄포가 되는 것입니다. 줄포는 건선명으로 불렀다가 1915년 줄포리가 줄포면으로 승격하여 바뀌었습니다.
현재 보안면 면소재를 지나 사창지역이 제안포로 추정이 되며, 백제시대에는 주류성의 남쪽 포구로 중요한 교통요충지였을 것입니다. 특히 백제 마지막 왕인 풍왕 당시에는 왜와 교류하던 중요한 포구였습니다.
줄포만의 갯벌(간석지)
이렇게 살아 있는 지명이 있는데도 금강과 건지산성, 학성과 당진의 백석포가 주류성이며 백강입니까?
웃기지도 않습니다. 일부 교수라는 사람들은 그 지역에서 돈을 조금 주니 그곳이라고 주장하는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짓을 합니다. 양심이 있나요? 당신이 쓴 글은 역사에 기리기리 남습니다. 친일사학자들과 같은 존재들이 바로 이렇게 지자체에서 질끔 흘리는 돈에 눈이 어두워 지역이기주의에 편승한 글을 쓰는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