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군의 일본침공
원나라 쿠빌라이는 고려를 정복하고 바로 일본을 정벌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쿠빌라이는 고려에 1274년(元宗 15) 정월 쾌속선 3백 척, 몰수선 3백 척, 천석주(千石舟) 3백 척 등의 크고 작은 전함 9백 척을 건조하도록 하였다. 전함의 건조를 위해 원은 고려인 홍다구(洪茶丘)라는 사람이 취임을 하였다.
전함의 건조는 부안의 변산과 장흥의 천관산(天冠山)의 2개소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원나라는 빠른 시일에 일본을 정벌하고자 고려에 배의 건조를 독촉하였고, 고려정부는 대단히 경제적으로 부담을 느꼈다.
고려는 6월에야 겨우 3백 척의 전함을 전조하였다. 고려가 3백 척의 전함을 만드는데 인부와 목수가 약 3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건조된 전함은 모두 합포로 옮겨져 출전을 준비하였다.
또한 원은 고려에 병사 8천명과 수군 1만 5천명이 참전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이것이 너무 과해 도저히 원의 요청을 수락할 수 없어, 다시 원과 교섭을 하여 결국 병사 6천명과 수군 7백 명이 참전하게 된 것이다.
이해 원종이 죽고 충렬왕(忠烈王)이 즉위하였다.
10월에 원나라는 도원수 홀돈이 원나라 군사 2만 5천명을 인솔하고 들어왔으며, 고려는 김방경이 총지휘자로 군사 8천명을 거르리고 합포에서 원나라 군사들과 합세를 하여 출항하였다. 당시 원나라군의 전함은 모두 9백척에 이르렀다.
여원연합군은 대마도를 점령하고 일본 규슈에 상륙하여 하카타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태풍이 불어와 여원연합군의 군함이 파손되어 대오를 잃고 표류하여 여원연합군 1만3천5백명이 물에 빠져 죽어 1차 원정을 실패로 끝났다. 쿠빌라이는 일본원정을 다시 하겠다고 일본에 사신을 보냈으나 피살되고 만다.
이에 격분한 쿠빌라이는 대규모로 일본원정을 준비하였다.
고려의 충렬왕 6년에 합포에 정동행성(征東行城)을 설치하고, 다음해 7년 총병력 15만으로 일본을 공격토록 하였다.
고려도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원나라와 합세하도록 하였다.
원나라와 일본군은 치열한 싸움을 여러 차례 있었는데 원나라에 불리하였다.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계속된 가운데 원나라의 지원군이 합세하자 전쟁은 자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던 중 7월에 태풍이 불어 원나라 15만의 병사와 고려군 1만명이 거의 죽고 생환한자가 겨우 1만 9천여명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결국 원나라와 고려의 일본침공은 태풍과 원나라 장수들의 내분으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원나라는 기마민족으로 배를 건조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송의 전함과 군사들을 이끌고 전쟁에 참가를 하였으며, 몽골군은 고려의 전함을 이끌고 전쟁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당시 고려군의 전함을 건조한 곳인 변산반도는 그 후 고려 말부터 조선초기까지 왜구의 침입을 심하게 받았다.
아마도 이곳이 일본정벌의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었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곳 호벌치에서 전쟁이 심했고, 한일합방 후 1929년에는 일본의 貴族院 의원 다까도리(高取九郞)이 20만원에 1만정보나 되는 임야를 사들여 변산을 지켰다.
그러다가 1944년 대동아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의 國家總動員法에 따라 변산의 수목들이 전쟁의 목적으로 남벌이 되었다고 한다.
지난 겨울 난 두 번에 걸쳐 후쿠오카를 갔다왔다. 마스부치게이치 한일문화교류회장과의 두 번째 일본 여행은 많은 것들을 남겨주었다. 나는 물론이거니와 마스부치 회장도 나를 통해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았다고 한다.
후쿠오카 하카타항에서 가까운 신사를 그는 늘 한국사람들에 안내를 해준다.
아마 그는 이곳을 100번은 더 갔을지 모른다.
그는 그렇게 많이 이곳을 방문했어도, 나와 갔을 때 처음으로 몽골군과 관련된 것을 보게 된 것이다.
당시 전함의 건조를 했던 곳은 변산과 천관산 두 곳었다. 건조된 전함의 배를 균형 잡아주기 위해서는 닻이 필요하였다. 그 닻은 당연히 주변의 해안가에서 채취를 했을 것이었다. 나는 늘 그 돌이 보고 싶었고 찾고 싶었다. 그 마음이 통했는지 마스부치회장은 나를 부른다. 자신도 이곳에서 이것을 처음으로 보았다고......
언제가 변산을 갔을 때 효산스님이 나에게 몽골군이 배를 이곳에서 만들고 부안의 해안가에서 균형을 잡기 위한 돌을 채취한 흔적이 있다는 말을 들었었다.
가슴이 떨리는 순간이었다. 내 눈으로 800년 전의 흔적을 본 것이었다.
흥분을 가라 앉히고 난 안내판을 보았다. 그런데 웬걸......
그 돌은 전라남도 장흥만 기록을 해 놓았을 뿐 정작 내가 보고 싶었던 변산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하여간 중요한 것은 돌을 본 것이지만 난 부안에서 그 돌을 보고 싶었다.
기록은 다음과 같이 되었었다.
"서기 1281년 10만의 대군으로 하카타 항에 침공한 몽고군이 패전할 때 버리고 간 닻으로 사용했던 돌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붉은색의 돌, 흰색의 돌 그가지고 어느 것이나 출토품으로 전부 한국의 전라남도 장흥 남쪽의 천관산 부근에서 몽골군이 갖고 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58년 3월 후쿠오카현 문화재로 지정"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지만 위에서 언급한 붉은 돌은 엄연히 이곳 변산의 돌이다.
아래의 돌이 바로 변산에서 채취한 돌이다. 이런 류의 돌들은 변산반도 곳곳에서 볼수가 있다.
아래 사진은 내변산의 한 해안가이다.
혹시 평평하게 깍인 이곳이 바로 돌을 채취해서 배에 싣고 마산으로 가서 일본침공의 선두에 선 것은 아닐까?
한편으로는 이곳 바로 계화도지역이 백강구지역으로 663년 백강전쟁이 벌었졌던 역사적 사실이 있었고, 내변산 개암사 위에는 바로 그 왜군과 백제군의 주둔지였던 주류성이 자리를 잡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이닐 수없다.
(백강전쟁기념사업회 이병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