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강전쟁(白村江の戦い)

백강구전쟁의 패배와 부흥백제국의 몰락

백강 문정사랑 2009. 9. 2. 18:11
 

백강구전쟁의 패배와 부흥백제국의 몰락


7세기 중엽 동아시아에서 주목되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나․당군과 제․왜엽합국 사이에 일어난 백강구전쟁을 들 수 있다. 이 전쟁은 당시 국제전쟁이라 일컬을 수 있을 만큼 참전국의 쌍방이 모두 군사적인 동맹관계를 활용하는데서 충돌된 사건이다. 이 전쟁에서는 참가한 나라들의 규모가 클 뿐 만 아니라 전쟁이 가져다 준 영향도 대단히 컸다. 전쟁의 결과는 나당군의 승리로 끝났던 바, 왜는 이 전쟁의 참패로 큰 타격을 받고 대외진출이 소극적이며 수세적으로 되었고, 신라는 이 전쟁을 통하여 자신을 갖고 삼국통일을 주도해 갔던 것이다. 또 국제적인 지위도 상승되었다.

  백제가 멸망한 것은 660년(의자왕 20년) 7월이었다. 백제가 나․당군에 의해 멸망되었다는 소식이 동년 9월에 백제의 사자에 의해 왜에 전해졌다. 동년 10월에 鬼室福信이 왜에 좌평 귀지를 보내 당의 포로 100여명을 바쳤다. 아울러 왕자 부여풍의 귀환과 군사원조를 요청하였다. 이 요청을 받아들여 齊明天皇은 662년 1월 27일 화살 10만개, 실 500근, 솜 1,000근, 베 1,000단, 가죽 1,000장, 종자용 벼 3,000석을 보내주었고, 夫餘豊이 백제에 귀환하도록 하고 부흥군에 군사원조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660년(齊明六年) 12월 齊明天皇은 築紫(츠쿠시)에 가서 병기를 조달하여 駿河國(쓰루가)에 배를 만들도록 명했다. 왜국의 백제구원준비는 4년간(660-663년) 계속되었다.

 왜는 663년 3월 전군장군 上毛野君稚子와 間人連大蓋, 중군장군 巨勢神前臣譯語와 三輪君根麻呂, 후군장군 阿倍引田臣比邏夫와 大宅臣鎌柄으로 편성된, 27,000의 백제지원군을 파견하였다. 그해 6월 전군장군 上毛野君稚子의 군사가 신라의 沙鼻과 岐奴江의 두 성을 점령하였다. 그런데 같은 달 풍왕은 복신이 모반의 의도가 있다고 보고 복신을 참하였다. 바로 이 중요한 시기에 풍왕 정부에 내분이 있었던 것이다. 663년 8월 13일에는 신라군이 주류성에 도착하여 백제군과 주류성 밖에서 몇 차례의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양측이 모두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상황에서 백제군은 다시 주류성으로 들어가 전투를 준비하였고, 신라군은 주류성을 포위하였다. 이 시기에 왜는 다시 백제에 지원군를 파병하였는데, 풍왕은 직접 백촌에 가서 왜군을 맞이하였다. 당시 왜선규모가 1천척이었는데, 수송을 담당하는 선박과 전투함을 포함하여 승선인원을 평균 1척당 40명으로 본다면, 왜선이 1천척이라는 삼국사기 기록은 백제 파병 총 왜선 수를 의미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왜군 병력은 662년 9월에 풍왕에게 5,000명, 663년 3월에 27,000명, 같은 해 8월에 10,000여 명을 합쳐 총 42,000여명을 백제로 보냈기 때문이다. 이러한 왜의 백제 지원은 661년 복신의 지원군 요청 직후부터 1년여 간의 제명왕의 직접 지휘 아래 전함구축과 군수물자조달, 군조직 및 훈련 등의 준비를 통하여 이루어 진 것이다. 따라서 7세기 동북아 대전을 사전에 준비한 나당군에 비하여 제왜연합군은 전쟁발발 이후 서둘러 준비를 해야 하는 불리한 입장에 있었다.

한편 당의 유인궤도 지원병을 요청하였고, 당은 손인사를 우위장군으로 삼아, 병력을 파병하였다. 한편, 신라 문무왕도 김유신 등 28명의 장군과 함께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당의 군사와 합세하여 주류성을 공격하였다. 백강구전쟁 당시 나당은 수군을 이끌고 8월 17일에 백강에 도착하여 미리 수세적인 진을 구축하고 있었다. 8월 27-28일 양일간의 해전에서 전함수가 많았던 왜수군은 여러 차례의 선제공격을 시도하였는데, 마지막에 기상과 지형을 살피지 않고 공격하여, 나당군의 화공과 썰물로 인해 갑작스럽게 바닷물이 빠져 뱃머리를 돌릴 겨늘도 없어 갯벌에 함선들이 박혀 패할 수밖에 없었다. 백강구전쟁의 패전으로, 왕성인 주류성에서 전장에 나와 있던 풍왕은 할 수 없이 663년 9월 1일 고구려로 망명하게 된다. 이로써 정통성을 가진 백제의 마지막 정부는 결정적으로 붕괴되어 백제가 멸망하는 계기가 된다.

한편 백강구전쟁의 패배와 주류성의 함락에도 불구하고, 任存城에서는 遲受信이 이끄는 백제군이 10월 22일부터 11월 4일까지 신라군의 공격을 격퇴하였다. 신라군이 임존성에서 퇴각하자 당군이 다시 임존성을 공격하였는데, 신라의 패전을 본 당군은 작전을 바꾸어 풍왕 정부 붕괴 후 융에게 갔던 백제의 흑치상지와 사타상여로 하여금 임존성을 공략하도록 하였다. 결국 백제인 흑치상지와 사타상여에 의하여 성은 무너졌다. 임존성의 함락으로 백제는 완전히 나당군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백강구전쟁에서 제·왜연합군의 패전과 풍왕의 망명 후, 나당군의 대규모 총공격을 받은 주류성의 백제군은 보름이 넘도록 방어하다가, 마침내 왕자 충필 등이 왜군과 함께 신라에 항복하였고, 663년 9월 8일 주류성은 함락된다.

이상이 삼국통일전쟁의 중 대략의 백제 멸망과정인바, 주류성․백강싸움은 다음과 같이 3차에 걸쳐 전개되었다.

 첫 번째는 660년 7월로 제1차 나․당군의 사비성(왕도) 공략 작전이다. 무열왕(김춘추)이 당에 군사원조를 요청하는 것이 실현되자 김유신과 더불어 5월 26일 경주를 출발하였는데 앞서 21일에 왕자 법민(문무왕)으로 하여금 덕물도에 나아가 소정방의 당군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이때 소정방은 “오는 7월 10일 백제 남방에서 신라군과 합류하여 왕도를 무찌르기로 하자”고 말하였다.

  신라군은 7월 9일 황산벌에서 계백에 이끄는 백제군을 격파하였다. 한편 소정방은 기벌포에서 백제군을 부수고 김유신 등 신라군이 늦게 도착한 것을 꾸짖었다. 12일에 나당군은 왕도(사비)를 포위하고, 18일에는 드디어 의자왕의 항복을 받았다.

 

 

 (황산벌에서 백제장군 계백은 자신의 가족을 모조리 죽이고 전투에 임했다. 가족을 죽기 전 계백장군의 딸이 계백에서 자신은 절대로 아버지 칼에 죽임을 당할 수 없다고.... 자신도 전쟁이 참여하여 신라놈 한놈이라도 죽이고 죽겠노라고..... 그의 묘로 추정되는 곳이 바로 지금 논산시 부적면 수락산 주변의 가장골이 위치해 있다.) 

 

   두 번째는 661년 3월, 신라군의 두량이성 진공 작전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12일에 대군이 古沙比城 밖에 來屯하여 36일 동안 두량이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4월 19일에 철수하여 본국으로 후퇴하게 된다.

 세 번째는 663년 8월, 제2차 나․당군의 백강과 주유성 총공격이다. 주류성(位金岩山城) 총공격은 사비성이 함락된 지 4년만인 663년 7월 17일부터 시작되어 9월 7일 주류성 함락까지 기간이다.

 

(사산산성이다. 661년 3월, 신라의 태종은 5만의 대병을 파견하여 고사비성(현 고부) 밖에 내둔하여 두량이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36일 동안 두량이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4월 19일에 철수하여 본국으로 후퇴하였다는 기사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후퇴하는 도중에 빈골양에서 대패하고 돌아간다. 그후 태종무열왕은 이 전쟁의 패배로 장군들을 벌하고 일주일 후 화병으로 죽는다. 빈골양은 지금의 정읍시 태인이다. 충남 청양에서 태인으로 삥삥돌아 후퇴하는 어리석은 군대가 어디있나? 이처럼 어처구니 없는 학자들이 두량이성을 청양의 정산이라 말한다.제발 억측은 그만 부리자. 바로 두량이성은 이곳 부안 일대의 산성들을 말함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