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강전쟁(白村江の戦い)

제왜연합군의 패전원인

백강 문정사랑 2009. 9. 2. 18:26
 

제왜연합군의 패전원인


제왜연합군의 패전원인은 크게 외부적인 요인과 내부적인 요인으로 분석할 수 있는데, 외부적인 요인은 나당군의 우세한 군사력과 당의 以夷制夷政策이고, 내부적인 요인으로는 풍왕 정부의 내분과 제왜군의 전략 전술 운용의 실패를 들 수 있다.

여기서 결정적인 요인은 제왜연합군의 나당군에 비한 군사력 열세이다. 제왜군과 나당군의 군사력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사서들을 통해서 군사력을 추적해 불 수 있다. 먼저 백제군을 지원한 왜군을 살펴보면, 풍왕이 왜에서 귀환할 때의 5천명을 포함하여 백강구전까지 3차에 걸쳐 총 약 4만 2천명의 병력지원이 있었다. 왜선은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약 1천척이 동원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실제 백강구전쟁에 참가한 전함은 이 보다는 적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왜선은 백제의 군사외교채널을 통한 지원요청에 의하여 급하게 제작되었고, 전함 조선기술 또한 당에 비해 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백강구전에 참전한 왜군은 전함수가 많기는 하였으나 현해탄을 넘어 항해를 하자마자 현지 지형 및 기상과 적진의 정보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채 전투를 하였기 때문에, 미리 와서 준비하고 있던 나당군에 비해 전력과 전술이 미흡하였을 수 있다.

반면에 당시 신라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추가로 파병된 당군의 군사력은 수군 전선 170척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나당군의 군사력으로 볼 때, 더 많은 전투력이 투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신라군은 28명의 장군을 중심으로 약 5만에 이르는 군사를 동원했을 것이다. 이렇게 신라 지원 당군은 백제 지원 왜군에 비해 우세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당의 분열책인 以夷制夷政策을 들 수 있다. 임존성 전투에서 실패한 이후 소정방이 철군한 뒤 백제군들은 왕성인 사비성을 계속해서 공격하였고, 정통성을 가진 왕자 풍장을 백제의 신왕으로 옹립하였다. 이에 당은 백제를 분열시키기 위해 당으로 압송했던 융을 중심으로 한 허수아비 정부를 세웠다. 이는 중국의 전통적인 以夷制夷政策으로, 백제군을 양분시켜 그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에서 융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며, 수세에 몰린 당은 끊임없이 공격하는 백제군을 교란시키기 위한 전술의 일환으로 풍왕과 융을 대립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백제에 두개의 정부가 들어서자 백제군 측에서 동요가 있었을 것이고, 백제군 지도자들에게도 선택의 갈등이 야기되었을 것이다.

내부적인 요인으로는 풍왕 정부의 내분을 들 수 있었다. 먼저 풍왕 정부의 중심에 있던 도침과 복신 사이에 웅진강구와 豆良尹城 전투 이후 갈등이 발생하여 도침이 제거된다. 도침제거 후 복신은 군사적 정치적으로 실권을 잡게 된다. 그리고 풍왕은 장기간의 일본체류로 국내 정치기반이 약하여 정권을 실질적으로 통제하지 못하였고, 피성에서 주류성으로 환도한 후에도 국가제사 주례의식의 주관을 할뿐이었다고 한다. 복신이 권력을 독점하게 되자, 풍왕과 복신 사이에 갈등이 발생한다. 복신이 병을 핑계로 굴속에 누워 풍왕의 문병을 기다렸다가 풍왕을 살해하려 하였는데, 풍왕이 이를 미리 알고 복신을 살해했다. 이러한 내분으로 백제군의 세력은 약화되었고, 사기도 떨어졌으며, 도침과 복신을 따르고 지원했던 군사 및 백성들과 함께 단합된 힘을 발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음으로 제왜군의 전략 전술 운용의 실패를 들 수 있다. 해전에서 중요한 승리요인은 기상, 해류, 해안지형 조건, 군사정보, 우수한 무기, 잘 훈련된 군사와 전략 전술 등을 들 수 있다. 백강구전쟁 때의 나당과 제왜군을 비교해보면, 당의 수군은 미리 백강에 와서 진을 굳게 치고 제왜군의 수군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던 나당군은 백강지역의 기상, 해류, 해안 지형지세를 잘 살펴 방어전략을 수립했을 것이고, 당군의 우수한 전함과 병기 및 훈련된 군사를 바탕으로 한 전술로 대비하였을 것이다. 제왜군은 진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당의 수군을 선제공격하였으나, 기상을 보지 않고 공격하여 눈 깜짝 할 사이에 좌우에서 공격하는 당 수군의 협격을 받아 패배하였고, 특히, 풍향과 조수를 살피지 않아 뱃머리와 고물을 돌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익사자를 내었으며, 화공에 의해 왜 수군 4백여 척의 전함이 전소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따라서 제왜군은 전략 전술면에서 취약하였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은 드넓은 호남평야의 중심이 되어버린 두포천 하류의 동진면과 행안면, 계화면 일대에서 백강구 해전는 일어났다. 즉 계화도가 간척되기 전의 계화도 내해가 해전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계화내해는 동진강과 두포천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동진강의 일부로 인식될 수 있는 지역이다. 계화내해는 수 많은 갯골로 나무의 가지처럼 바다로 연결이 되었던 지역이다. 왜수군이 지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은 갯골에 대한 이해부족이 가져 온 결과라 할 수 있다. 갯골은 밀물과 썰물의 조수차에 의해서만 드러나는 곳으로 만조시에는 파악이 되지 않지만 썰물때만 드러나기 때문에 지형지세에 어두웠던 왜수군은 좁은 갯골에서 뱃머리를 돌릴 수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