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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일본(倭)은 백제를 도와주었을까?(일본의 역사인식)

백강 문정사랑 2009. 9. 3. 10:05

 

 

 왜 일본(倭)은 백제를 도와주었을까?(일본의 역사인식)


  일본에서 「白村江の戰い」라 부르는 백강구전쟁에 관한 연구는 明治 20년(1887년) 津田左右吉에서부터 시작하여 백강구전쟁의 정치, 역사지리, 문화교섭, 기기(記紀)의 연구 등 여러 방면의 연구 논문이 나와 있다. 1960년대 전의 학설은 백강구전쟁이 왜군과 당군의 국제전쟁이며, 일당전쟁이라고 하였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른 일본형의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단순히 백제를 지원하기 위한 당시의 대외교섭이 아니라 이미 한반도 남부에 구축해 놓았던 식민경영을 다시 건설하기 위한 목적에서 한국에 대한 역사적인 인식을 應神天皇의 삼한정벌 이래 한국이 일본의 부속국임을 강조한 것이었다.

 

 

 

  일본의 종래의 해석은 일본의 속국관계에 있었던 백제를 지원하기 위한 군사적인 출병이었다는 것이다. 역사지리연구에서는 일본에 복속한 전적지(戰蹟地)를 한반도에서 찾고 일본이 주장하는 소제국론을 역사에서 확인하려 하였다.

  1963년 북한의 김석형씨가 일본열도 안에 한국의 분국(三韓三國分國說)이 있었다고 한 학설을 발표와 일본의 중국사학자인 西嶋定生에 의한 冊封體制論이라는 학설이 나오자 종래 일본의 황국사관적인 일본 중심의 역사관을 다시 한 번 뒤돌아보아 일본의 국제적인 입장의 재인식을 촉구하게 하였다.

  森公章.은 자신의 저서「白村江以降」에서 일본이 참전한 동기에 대해서 세 가지의 제설로 정리하였다. 첫째, 中大兄皇子일파가 외교정책을 친신라, 친당으로부터 친백제로 전환하였기 때문에 백제를 구원하게 되었다. 둘째, 中大兄皇子일파는 조선반도의 항쟁에 불개입의 입장에 서 있다가 백제가 왜를 억지로 백강구전쟁에 끌고 가 왜는 수동적으로 백제를 구원하게 되었다. 셋째, 왜는 일관해서 친백제정책이였기 때문에 백제를 지원하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백강구전쟁의 일본에서의 연구동향을 정리하면서 자신은 백제구원의 지원파병은 왜국의 외교정책 속에 그 동기를 찾았다. 즉 왜국의 외교는 백제일국 중심주의이며, 예부터 이어진 백제의 문물확보, 물자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백제와의 관계 속에서 수동적으로 지원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井上秀雄는 “백제구원의 동기를 왜국 내의 정국의 동향 속에 그 이유를 분석하였다. 大化改新이 후 왜국의 정국은 매우 불안했다. 645년 古人大兄皇子의 반란, 658년의 有間皇子의 반란 등 신정권 내부의 권력투쟁이 격화되고 있었고, 이것을 수습하기 위하여 백제구원군을 파병하였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遠山美都男은 “齊明天皇 다음의 왕위를 태자 中大兄皇子에 계승시키기 위한 정당성을 가지기 위한 계기로서 백제에 군사를 파병을 결행했다. 또한 백제를 일본의 신하의 위치에 두기 위하여 백제에 구원군을 파병하였다”고 해석하고 있다.

  小石房子는 齊明天皇이 渡來人과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출병의 행동을 문화적 혜택을 받고 있었던 母國 백제를 위한 동정심으로 백제부흥대전을 위해 지원병을 파견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는 재일동포 사학자 이진희는 小林惠子의 혈맥관계의 연구를 주목하여 “濟明, 天智朝는 백제왕조를 일심동체, 왜와 백제가 하나의 공동세계로 친밀히 묶어져 왔고 백제구원군 파견은 이해타산을 초월한 차원의 문제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