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성과 금사동산성의 관계
주류성과 금사동산성의 관계(최진성박사)
그렇다면 백제부흥군들이 주류성을 전략적 거점으로 삼는 과정에서 산성을 중심으로 방어 체계를 그토록 빠르게 구축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를 위해서는 백제시대의 군사전략적인 산성 체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으며, 그 출발점에 고사비성과 피성이 있다.
백제시대의 고사비성은 금강 이남의 해안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을에 속해서 당시의 행정체계상 五房의 하나인 中房이었다(전, 1996). 그 관할 지역이 지금의 전주, 익산, 고창, 정읍까지 망라되었기 때문에 그 위상은 절대적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주류성 중심의 신속한 방어 체계를 이해하려면 금사동산성을 중심으로 한 군사전략적 체계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 백제시대의 고사비성은 현재 고부초등학교(조선시대의 고부군 읍치)가 위치한 곳이 아니라 영원면 은선리에 위치한 ‘금사동산성’이었다(영원면지, 2007).
영원면 은선리의 금사동산성이 중심이 되는 산성 체계는 백제시대부터 존재한 전략적 체계였다. <그림 1>에서 금사동산성이 속한 ‘제2 방어 산성’은 ‘제1 방어 산성’이었고, 주류성이 속한 ‘제1 방어 산성’은 ‘제2 방어 산성이 된다. 다시 말해서 고사비성은 주류성 이전부터 이 지역에서 최대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금사동산성을 중심으로 한 산성들의 배치를 살펴보면, 서쪽은 고부천 건너편에 주류성과 인근의 산성들이, 북쪽은 부안진성과 백산성을 비롯한 해안 방어 산성들이, 동쪽은 정읍천변의 시루봉산성과 대산리토성을 비롯한 ‘내륙 방어 산성들이, 남쪽으로는 곰소만을 방어하는 제안포(제내포)산성 등이 분포하고 있었다. 이로 미루어 금사동산성은 고부천과 동진강 유역 일대를 대표하던 최상의 전략적 거점이었다. 이렇게 구축된 백제시대의 금사동산성 중심의 산성 배치 체계가 그대로 주류성 중심의 체계로 계승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1, 주류성의 방어체계, 최진성)
금사동산성은 이러한 군사전략적 기능과 더불어 경제적 중심지로서의 기능도 갖추고 있었다. 해발고도가 약 44m에 불과한 인근의 은선리토성에는 행정 治所가 위치하였고(영원면지, 2007), 서해에서는 해산물과 소금이, 고부천과 동진강을 비롯한 하천유역에서는 쌀을 비롯한 농산물이, 그리고 동쪽의 노령산지로부터는 임산물 등이 풍족하게 유입되었다. 특히, 백제시대에 곰소만과 계화도의 천일 제염업을 통한 소금이 갖는 경제적 가치는 매우 중요하였기 때문에 금사동산성이 中房으로 인정받는 데 기여하였을 것이다. 이로 미루어 주류성은 지형적 입지 조건 때문에 군사전략적 중심지로서, 또한 금사동산성은 경제 및 행정 중심지로서 역할 분담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제의 피성 역시 금사동산성과 더불어 평야지대의 곡창지대로 주류성과 방어산성들을 위한 식량보급기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고 보인다. 금사동산성에서 주류성까지는 육로를 통한 보급품의 운반이 주가 되었다면, 피성에서는 해로를 통한 곡물의 운송이 주류를 이루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주류성과 직접 연결되는 두포천과 고부천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이와 함께 왜군들이 1차로 파견된 후, 주류성에 주둔하는 수많은 장병들을 위한 보급품의 수송 문제가 가장 큰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전라도 각지에서 공급되는 보급품의 조달을 원만히 해결하기 위한 최적지로서 주류성이 갖는 또 하나의 유리점이라고 할 수 있다. 주로 해상 보급로를 통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를 위한 포구의 확보가 중요하였을 것이다. 이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지금까지 주류성이 백제군들의 최대거점이 된 이유를 미시적인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패전당할 때 웅진의 공산성이나 사비의 부소산성이 적의 침입을 막기 힘들만큼 방어력이 떨어지는 산성들이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심, 2003). 패전의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약 13만이나 되는 대군이 누구도 예상 못한 기동력으로 사비성을 공격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신라가 당나라 군대의 보급품을 모두 제공하였기 때문에 그만큼 신속하고 집중적으로 공격해서 백제가 미처 대처하지 못하였던 것이 패인의 중요한 원인이었다. 즉 신속한 기동력이 나당연합군의 공격력을 증대시켰다는 점이다. 이런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라도 백제군들은 그만큼 신중하게 대비하였을 것이고, 그래서 고른 성이 주류성이었다면 둘레 4km가 되는 대규모 석성을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쌓았던 것으로 사료된다.
비록 금사동산성이 주류성을 위한 보급품을 조달하였다든지, 소위 ‘갈령도’를 통해 주류성으로 진입하는 내륙의 공격로를 방어할 수 있는 소규모의 방어 또는 위성산성들을 구축하였더라도, 나당연합군들의 대규모이면서도 기동성이 있는 공격에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벡제군들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산에 의지한 군사방어체계를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과거의 역사를 백제부흥군들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여, 1999).
지금까지 백제군들의 최대거점인 주류성이 변산반도에 위치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고사비성으로 추정되는 금사동산성은 백제시대부터 중방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기반 시설이 잘 구축되어 있었다(전, 1988). 군사전략적 요충지가 절실했던 백제군들은 주류성과 같은 천혜의 요새지를 거점으로 삼으면서 동시에 금사동산성으로부터는 군사․행정․경제적 지원을 함께 받았다. 이러한 주류성(해안)과 금사동산성(내륙)의 밀접한 상호보완적 관계 때문에 백제군들이 변산반도를 최대 거점으로 삼았던 이유가 분명해진다. 또한 앞서 언급한 신라의 품일 장군이 주류성을 공략하기 위한 전초전으로 금사동산성을 먼저 공략한 것도 이러한 주류성과의 관계를 무력화시킴으로써 주류성을 압박하려던 목적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