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해리평지리고인돌2
오랜만에 대박입니다.
하여간 여름에는 고인돌이 보이지 않아서 찾기가 힘이듭니다.
그런다고 고창군 어디에도 안내판이 있거나 고인돌을 소개한 것은 없으니까요.
(죽림리 빼고, 도산고인돌은 찾기가 넘 어려워요.
이 두군데를 제외하고도 고창 고인돌들이 너무 좋은 것이 많은데 소개를 해주는 곳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시작을 했지만....)
지도에 표시된 고인돌도 없구요.
다행히 제가 지리과출신이라서 지도를 보면 위치는 파악이 되니 이렇게 표시는 해야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요즘은 구글이나 다음에서 지도를 제공하고 있니니 얼마나 좋습니까?
멀리서도 보이니 이 고인돌의 규모를 대강 짐작은 하겠지요.
가까이 다가가서 바라 본 순간 참으로 기뻣습니다.
이런 고인돌을 소개하지 않는다면 고창인이 아니라는 생각이지요.
제가 고창에 이사를 와서 살아보니 고창인이 그렇게 따스하지는 못하네요.
제가 초중고를 이곳에서 다닐 때는 몰랐는데,
이사를 올 때부터 죽을 쑤었습니다.
세상에 짐이 많다고 돌아가는 이삿짐센터는 처음봅니다.
모든 고창인들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요.
하여간 고창으로 이사를 올 때 저의 첫인상을 모이사짐센터에서 각인을 시키더만, 모택배회사는 더 가관입니다.
세상에 주소에 3층이라는 말이 없다고 절대로 올려 줄수없다고 떼를 쓰는 택배원도 이곳에서 처음봅니다.
그리고 군청이나 면사무소를 가면 함부로 반말 비스무리 하는 곳이 고창이 조금 심하더군요.
제가 살았던 곳은 서울시 성북구였거든요.
하여간 고창인들 저의 제2의 고향이라 애정이 듬북가기 때문에 이런 비판도 해봅니다.
다시 고인돌로 가봅니다.
이 거석은 뒤의 산에서 채석을 해 온 것 같습니다. 암석의 성분이 같아요.
분석을 해본 것은 아니지만 생김새가 같더군요.
이 거석을 옮기는데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크기는 정말로 큽니다.
장축이 510cm, 단축이 310cm, 두께는 260cm로 규모면에서 아산운곡리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크긴크지요.
아래의 사진은 정면입니다.
아래의 사진은 축면입니다. 꼭 쇼트랙선수 모자처럼 생겼습니다.
앞부분은 크고 뒷부분은 삼각형의 모양입니다.
주위는 가시덤불로 덮혀서 겨울철이 아니면 접근이 조금 어려울 듯합니다.
고인돌에 올라가 정면을 찍은 사진입니다.
이 고인돌을 축성하고 고대인들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네요.
그리고 이 대지에서 왜 이런 고인돌을 만들었는지 궁금하구요.
다행스러운 것은 도산리고인돌처럼 습지를 건너 축성한 것이 아니라 뒤산에서 돌을 가져와 덜 힘이 드렀겠지요.
수천년을 무심히 앞 만 보고 지낸 이 고인돌의 주인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자신의 후손들이 이렇게 거대한 고인돌을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해서 만든 것에 뿌듯함을 가질까요?
아님 부질없음을 느꼈을까요?
수천년동안 앞을 바라보고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기 시작한 차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요?
우리 아들을 앞에 세우고 사진을 한 컷 찍어 봅니다.
요녀석은 와편이나 뭔가 나오면 땅에 묻습니다.
왜냐면 누가 찾아내어 가져가면 안된다고요.
고인돌 뒷면입니다.
아들이 올라오려고 발버둥치는데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면 경사가 가파르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시덩쿨들이 있어 쉽지가 않습니다.
고인돌의 갈라진 틈으로 이렇게 리기다소나무가 자리를 잡고 자라고 있습니다.
가시덩쿨도 고인돌의 한 자리를 잡고 자라고 있네요.
시간이 이렇게 흐르니 다양한 식물군들을 형성하면서 이들의 척박한 삶의 터전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고인돌 아래를 흐르는 냇가가 있습니다.
겨울의 찬바람이 아직 꺽이지 않아 물은 얼어 있지요.
아들 녀석이 돌을 던지며 얼음을 깨고 있습니다.
이 아이가 얼음을 깨는 것과 같이 우리들 마음도 자연에 대한 얼음을 조금이나 깨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무나 돌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죽었다는 생각은 우리의 찬 얼음이 아닐까요.
고인돌 위에서 서로 공존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인간들의 삶을 뒤돌아 봅니다.
늘 우리는 이들과 함께 공존한다는 사실을 잊었나봅니다.
마음의 얼음을 깰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지요.
작은 시냇물이지만 이곳은 깊이도 있고 물이 맑아요.
차디찬 물을 손에 담아 한 잔을 먹고 싶은데 내려가기가 싫어서 그냥 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