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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일사 주지, 승무 전수교육조교 김묘선

백강 문정사랑 2012. 3. 16. 14:37

커뮤니티/ 일본 대일사 주지, 승무 전수교육조교 김묘선
2012.02.08 21:53 입력
▲01_2011이광수 선생과

 

 

 

종교, 예술, 문화, 인종을 넘어 삶의 근본자리로 귀의하는

 

우리시대 춤꾼, 김묘선                             글.사진 이대건

 

 

 

아와오도리, 낯익은 혹은 낯선 춤이 묘하게 어우러지는

 

 

2011년 아와오도리(阿波踊り) 축제. 한국무용단이라는 푯말 뒤를 따라, 옥색 청색 고운 한복을 입은 스무 명 남짓 무용단이 춤사위를 이어간다. 낯이 익은 우리 춤과 낯선 일본의 춤이 넘나들며 맺고 풀기를 거듭한다. 사미센 연주에 맞춰 추는 도쿠시마(徳島)의 전통 춤을, 우리 전통악기로 연주하면서 우리 춤사위로 표현하는 것이다. 여기에 아시아는 하나, 조화롭고 평화로운 동반자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 맨 앞에서 춤을 이끄는 이가 눈에 띤다. 2002년부터 이 축제에 우리 음악과 춤을 매개한 주인공 김묘선, 그다. 맨 뒤를 받치는 이광수 민족음악원 풍물패가 일구는 푸진 쇠와 장구가락 사이를 그와 제자들의 춤사위가 채운다.

 

아와오도리 축제는 400년 전통을 가진 일본의 3대 축제(마쯔리) 가운데 하나다. 이날 참가자들을 쫓는 카메라 가운데는 NHK 다큐멘터리 팀이 있었다. NHK 앵커 료사쿠 스기시마, 뉴스 취재를 통해 김묘선을 알게 되었고 그의 삶이 주는 묘한 매력에 끌려 스스로 PD 역할을 하며 다큐멘터리 제작에 나선 것이다.

도쿠시마 아와오도리 페스티발 공연과 함께 도쿠시마(나루토문화회관), 교토(교토문화회관)에서 두 차례에 걸친 무대공연이 있었다. 김묘선 발림 무용단과 함께 올해는 쇠의 달인, 비나리의 달인 이광수의 민족음악원이 참여했다. 거기에 피리 이종대, 해금 홍옥미, 가야금 원경애, 판소리 조주선, 아쟁 이관웅, 대금 이성준 같은 내로라하는 국악계 인사들이 참여해 1000여 명이 넘는 일본 관객들의 가슴에 우리 음악의 깊은 울림을 남겼다. 특히 이날 선보인 지전춤은 근 20년 전 인천종합문화회관 개관 1주년 기념공연에서 김묘선, 이광수가 함께 ‘춤을 위한 소리굿’으로 올렸던 것을 다시 재현한 것이었다.

 

운명, 춤과 만나다

 

맺고 풀어지고 맺고 풀어지는 한바탕 소리와 춤의 바람이 잦아든다. 그 중심에 섰던 한 사람의 삶이 주는 여운이 깊다. 김묘선, 천상 춤꾼 그가 갑작스레 일본인 승려와 결혼을 하더니, 10여 년 뒤에는 그 스스로 승려가 되고, 1200년 고찰 대일사의 주지가 되었다. 한국인이며 게다가 여성으로 이룬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의 운명 맨 앞자리에 물론, 춤이 있었다.

김묘선과 춤, 인연은 초등학교 3학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구역 가까운 KBS홀 고전무용발표회를 앞둔 리허설이었다. 어떤 기운에 휩싸여 찾은 그곳에서, 또래 아이들부터 일반인까지 흥으로 추는 우리 춤사위를 처음 마주하게 된다. 그는 본 발표회까지 무엇에 홀린 듯 자리를 뜨지 못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한밤중이었다. 물론 집에서는 ‘사라진 아이’를 찾느라 한바탕 소동 끝이었다. 경찰에 신고하고, 심지어 점집에까지 찾을 정도였다. ‘밤을 넘기지 않고 돌아오는 아이, 무언가에 홀려 있으니, 그걸 하게 하라.’ 애타는 부모 품에 알 듯 모를 듯 묘한 점괘와 함께 사라졌던 아이가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그를 ‘홀렸던’ 춤과 인연을 맺지 못한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는 한국인이라는 따돌림으로, 한국에서는 ‘일본에서 온’이라는 딱지가 붙어 제대로 고등 교육을 받지 못한 아버지가 독학으로 시험을 마치고 공무원 생활을 할 때였다. 한군데 정을 붙일 만하면 이사와 전학이 이어졌다. 초등학교 시절만 모두 여섯 차례 전학을 다녔을 정도니, 변변하게 우리 춤을 배울 길도 마뜩찮은 일. 그의 기억에 조각조각 남은 영상처럼, 운동회 때마다 전교생이 모인 단상 위에서 고전무용 시범조교 노릇을 하며 춤의 허기를 달랬던 것이다.

 

운명, 김천흥 이매방과 만나다

 

그렇게 어깨 넘어 배우는 춤, 갈증이 여전히 채워지지 못한 채, 여느 학생들처럼 그는 여자상업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상경한다. 그의 첫 일터는 낙원동 낙원빌딩에 자리잡은 작은 단체. 서울의 각 대학 학생들이 드나드는 단체였다. 낙원동 일대를 제집처럼 드나드는 시절, 문득 우리 춤 공연을 알리는 현수막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편지를 한 통 올린다. ‘와서 배우라’는 답신과 함께 만나게 된 이가 김천흥 선생이다. 선생은 조선 마지막 왕 순종 앞에서 춤을 추고 연주했던, 정재(궁중무용)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선생의 춤은 손끝하나의 움직임까지 절제하며 추는 춤, 정재.

선생은 묘선에게 ‘네게 맞는 춤꾼’ 한 사람을 소개한다. 그이가 이매방 선생이다. 선생은 ‘하늘이 내린 춤꾼’이라는 세상의 평가에 맞게 승무, 북춤, 살풀이춤의 대가였다. 이매방 선생 수하에 들어, 그는 춤의 정수와 마주한다. 드디어 열 살 소녀의 ‘혼줄’을 빼앗았던 춤의 자리가 십 수 년을 훨씬 지난 뒤에야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그 때부터 낮엔 일, 밤엔 춤의 생활이 시작된다. 선생의 가장 가까이에서 선생을 시봉하며 선생의 말투며 손끝, 몸짓 하나까지 허투루 놓치지 않고 몸으로 익히는 고단한 삶이 이어진다. 그 바라지 중에 선생은 인간문화재에 지정된다. 묘선은 상경한 지 8년, 늦깎이도 한참을 늦깎이로 대학에 진학한다. 추계예술대학교 국악과이다. 당시 추계예대는 후기 예술대학으로 뛰어난 재원들이 많았다. 현장 음악가들에게 문을 열어, 명인들이 그의 후배로 대학문을 열곤 했다. 대학의 정기발표회에는 다른 대학의 교수들이 찾을 정도였다.

1987년 동아국악콩쿠르 전통무용부문 금상 수상, 1989년 이수자 지정, 연세대에서 대학원 공부 등으로 바쁜 시기를 보낸 그는 UCLA로 어학연수까지 다녀온다. 3년여 기간 동안 이매방 전통무용보급소 남가주 지부를 차려 스승의 춤사위를 알리며 제 춤을 가다듬는 시간을 보낸다. 이 시기는 1987년,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대신해 5남매 동생들의 삶을 함께 돌보아야했던 고단한 시기이기도 했다. 1995년, 그는 전통예술공연경연대회 종합대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한국에서 춤꾼의 이력을 다져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해,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운명과 마주한다.

 

운명, 대일사 15대 주지와 만나다

 

새로운 운명과 만남은, 1995년 김묘선 발림무용단이 도쿠시마의 코리아문화연구회 초청으로 아와오도리에 참석하면서다. 무용단 초청을 후원한 이가, 대일사(大日寺) 주지 오구리 고에이(大栗弘榮). 그는 100일 금식기도를 마칠 만큼 수행이 깊은 승려였다. 홍법대사로부터 1200년 고고한 내력을 이어온 대일사의 주지로, 시고쿠 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그가 아와오도리 공연 직후, 연통을 보내온다. ‘다짜고짜’ 청혼이었다.

우리와 달리, 불교가 생활 가까이 자리잡은 일본에서는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시험에 합격하면 누구나 승려가 될 수 있고 결혼 또한 허용된다. 게다가 사찰의 모든 재산과 주지 자리가 자녀에게 물려진다. 그런데 오구리 고에이 주지는 평생 수행하며 독신으로 살아온 터다. 그가 묘선의 춤사위,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에 반해 삶을 걸어온 것이다. 그러나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나라의 남자, 게다가 그는 승려가 아닌가, 묘선은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귀국한다. 여기서 그칠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뜨거운 구애는 더욱 기세를 올리고 이어진다.

대통령상 수상 이후, 대학의 전임 자리며 인천시립무용단의 러브콜 등 그 또한 주가를 올리며 한국에서 한창 춤꾼으로 이력을 쌓아가는 중이었다. 한편으로 어머니 노릇을 대신하며 5남매 동생들 혼사까지 마무리하는 동안, 그의 곁은 늘 허전했다. 어느덧 그의 나이 마흔, 결국 그는 자신과 자신의 춤에 모든 것을 걸고 사랑한 ‘한 남자’를 택한다. 1996년 3월 결혼과 함께 다시 일본 땅을 밟는다. 일약 화제의 중심에 선다. ‘18년 나이 차이, 대일사의 주지와 결혼한 한국 여성’.

 

운명, 고짱과 만나다

 

‘춤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게 하겠다.’ 오구리 고에이 주지가 결혼 전 그에게 한 약속이다. 대일사 주차장 한켠을 연습실 겸 강습소로 고쳐, 일본사람들에게 우리 춤을 알리는 공간이 되었다. 시코쿠의 크고 작은 공연장과 강습소, 대학에 우리 춤을 가르치고 공연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한국을 오가며 공연과 강습이 계속되었다. 마흔 나이에 맹렬하게 시작한 일본어도 실력이 붙어, 그의 일본 내 활동에 큰 보탬이 된다.

그는 2005년 무형 문화재 27호 승무 전수 교육 조교로 지정된다. 국내 활동에 한계가 있는 상황에서 언감생심이련만, 그의 활동이 한국과 일본을 넘나들며 오히려 큰 폭으로 확장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모두 남편의 전폭적인 배려다.

“멋쟁이에요. 여느 일본 남자와는 다른 어떤 에너지가 느껴지는 사람이에요. 처음 공연의 후원자로 만났을 때는 ‘야쿠자’인 줄 알았을 정도니까요.”

오구리 고에이 주지와 처음 만났을 때 이야기다. 머리카락이 없는 맨 머리의 다부지고 강한 인상, 승려인 줄 몰랐던 그는 처음 그렇게 오해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별명이 붙는다. ‘율 브린너’.

결혼 2년째 그는 남자 아이를 낳는다. 대일사의 후계자, 오구리 고모(大栗弘昴)다. 잠깐 대일사의 족보를 따져보자. 홍법대사 이후, 스승에서 제자로 법계를 이어오다 어느 시기 주지 제도가 정착된다. 그 뒤로부터 오구리 고에이 주지가 대일사의 15대 주지다. 세습되는 주지 자리지만 손이 귀해 양자 입적을 통해 대부분 승계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58세까지 독신으로 살다가, 늦게 결혼해 아들을 얻은 것이다. 양자 입적이 아닌 혈육에 의한 승계가 가능해진 것이다. 당사자는 물론이고 주변에서 그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오죽하겠는가.

고짱이라는 애칭이 붙은 그는 남편의 지극한 사랑 속에 부러움 없이 자랐다. 시코쿠 최고의 사립 초등학교를 다니게 하고, 몇 사람이 주변에서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돕게 한다. 한국어로 태교하면서 한국의 정서를 늘 가르쳐왔던 그다. 남편과 함께 있어도 한국어로 고짱과 이야기하는 것이 다반사. 그런 그였다. 교육문제도 ‘오히려 아이에게 좋지 않을 것’, 처음으로 남편과 갈등이 생겼다.

결혼 초, 독도 논쟁 이후 처음 일이다. 물론 독도 논쟁은 묘선의 한판승으로 싱겁게 끝났지만. 고짱 문제에서 남편의 고집은 남달랐다. 유치원부터 가라테를 가르친 것도 그렇다. 어머니 눈에 고짱은 무술보다는 예술 성향이었다고 한다. 이번에는 남편의 교육방식을 따르기로 했다. 다섯 살 흰색 띠로 시작한 아이가 10살 무렵에는 초록 띠를 맸다. 한겨울에도 맨발로 아버지 앞에서 가라테를 배운 덕이었다.

 

 

 

 

▲대일사 주지 인증식

 

 

 

운명, 대일사 16대 주지가 되다

 

‘우린 결혼 30주년 40주년, 하기 어려우니, 지금 실컷 함께합시다.’ 그래서 남편은 늘 그와 함께였다. 지금은 다리가 놓여 육지와 연결되었지만, 간사이공항을 가려면 꼭 배를 타야했다. 늘 항구까지 차로 배웅하고 배가 떠날 때까지 한자리에서 배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를 배웅하던 그였다. 혼자 쓸쓸히 앉아 배웅하는 모습이 쓸쓸해 보여 그러지 말라고 해도, 그는 ‘혹시 배가 가라앉으면 헤엄쳐 구해주려는 것’이니, 괘념치 말라했다.

결혼 11주년을 하루 앞둔 봄날 저녁이었다. 4월 3일 국립국악원에서 여는 개인발표회를 준비하느라 눈코뜰새없이 바빴을 때다. 그가 갑자기, ‘그동안 당신이 원하던 전수조교, 전수교육조교가 되었으니, 이제 승려자격을 준비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청혼을 거절하던 때처럼, 한마디로 거절한다. ‘춤 외에는 아무것도’라는 결혼 전 카드를 내밀면서다.

그런 그가 그 다음날 쓰러졌다. 뇌출혈이다. 수행하는 방에서 잠깐 잠든 듯 의식을 잃은 것이다. 3주 동안 식물인간으로 지낸다. 그 사이 고짱에게도 묘선에게도 큰 변화가 일어난다. 10살 고짱은 ‘대일사의 후계자로 잘 성장하겠으니, 자신을 지켜보아야 한다’며 아버지에게 힘을 주었고, 의식불명의 아버지는 손을 꼬옥 쥐는 것으로 화답한다.

가끔 손으로 고갯짓으로 의사소통하던 남편과 묘선, 이미 한국 공연은 홍보가 다 되어 취소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국립국악원 무대 대부분을 제자들에게 맡기고 잠깐 마무리 공연과 인사를 위해 하루 일정으로 서울을 다녀온다. 다시 만난 남편은 묘선의 손을 잡고 얼굴에 손을 한번 부비고는 영면한다.

대일사 주지의 장례는 장엄했다. 출관 전까지는 살아있는 것처럼 대하는 일본의 관례 탓에 고짱은 아버지가 여전히 살아있는 줄 알았다. 봄방학 숙제로 학교에 제출한 ‘아버지에게 쓴 편지’가 화제가 된다. 초등학교 2학년 조물거리는 글씨로 ‘눈물이 넘쳐 마른 땅이 연못을 이룬다’는 표현, 아버지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으로 NHK 방송을 탄 편지 내용에, 일본열도는 눈시울을 적신다.

장례가 끝난 뒤, 아버지의 부재를 실감한 고짱은 어머니에게 ‘내가 성인이 되어 대일사의 후계자가 되기까지 대일사를 맡아달라’고 했다. 쓰러지기 전 남편의 부탁이 생각났다.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았다. 한국에서 미국에서, 이매방 선생의 휘하에서, 5남매의 어머니 노릇을 하면서, 무용단을 이끌면서 억척으로 살던 그가, 지난 10여 년 동안 남편의 살뜰한 보살핌 아래, 아무것도 혼자 할 수 없는 ‘물정 모르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2007년 봄의 일이다.

그가 고짱과 함께 다짐한다. 승려자격시험과 주지인증시험을 위한 ‘목숨을 건’ 고단한 공부가 시작한다. 정말 그는 목숨을 걸었다고 했다. 20대 청년들도 하기 힘든 수행으로, 주변에서 그에게 5년정도 예상했던 승려자격시험을 1년만에 통과했다. 하루에 3~4시간씩 자며 100일간의 고된 수행과정을 거치고, 냉수목욕과 450개 작법이며, 깨알같은 불경을 모두 외우며 강행군해서, 주지인증시험 또한 1년에 통과했다. 주지 인증의 최종관문에서 여성이며 외국인인 자신의 정체가 문제였다.

주지 인증식에서 도쿠시마 교구장의 이야기가 답이 된다. ‘고령 출신 가야 여인 김묘선이 대일사의 주지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것이다. 일본 불교계에서 전해오는 바로는 대일사의 본산(종단본부) 교토 대각사의 주지가 된 성덕태자(聖德太子, Shotoku Taishi, 574~622)가 가야 출신이었다고 한다. 1400여 년 전 성덕태자로부터 이미 예견된 필연이라는 설명이다. 성덕태자는 일만엔 권 지폐를 장식하는, 일본 역사와 신화의 경계에 선 대표적인 인물이다. 마침내 묘선은 2009년 3월 4일 대일사의 16번째 주지로 임명된다. 대일사, 1200년 역사에서 한국인, 여성이 주지가 되었다. 일본 불교 전체를 통틀어 유래가 없는 일이다.

그는 머리를 깍지 않는 유일한 일본 승려다. 일화가 있다. 주지 인증절차에 아들 고짱과 함게 면접을 치르는 일정이 있었다. 스스로 머리를 짧게 자르고 가발을 준비한 소년은, 면접관을 향해 갑작스레 가발을 벗는다. 그리고 어머니의 상황을 이야기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춤을 멈추게 하지 않겠다던 오구리 고에이 스님의 약속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마침 면접관 스님은, 오구리 고에이 스님의 큰스님이었던 분. 갑론을박하는 다른 면접관을 설득해 결론을 내린다. 머리 깎지 않는 것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이 또한 유래가 없는 일이다.

 

시코구 순례길, 순례자들의 수호자

 

주지 김묘선의 일상은 새로 3시부터다. 가벼운 명상과 함께 몸단장을 마치고, 자료를 챙겨본다. 순례객들을 위한 법회를 열고 난 뒤, 사무실 문을 연다. 순례객을 대상으로 순례 인증 사인을 한다. 머리를 빗어 올리고, 검정색 승복을 입은 그의 필체가 붓끝에서 물 흐르듯 흐른다.

대일사는 시코쿠 88개 순례코스 가운데 13번째 순례지이다. 하루에도 수백 명, 한해 수십만 명이 찾아 잠을 청하고 자신을 되돌아 보는 곳이다. 시코쿠 순례길은 진언종 홍법대사가 순례하며 도를 닦았다는 길이다. 종교를 막론하고 일본사람이라면 죽기 전에 한번쯤 꼭 걷고 싶어하는 길이기도 하다.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어서 순례객은 오로지 걸어서걸어서 참 자신과 마주하는 길이지요.” 묘선은 순례객들을 이렇게 말한다. 그 순례길은 목숨을 거는 길이라고 한다. 그럴 것이 전통적으로 시코쿠 순례자들은 삿갓에 지팡이, 흰 옷 입고 순례길을 걷는다. 길에서 목숨을 다하면 다음 순례객이 장례를 치른다. 삿갓은 관 뚜껑, 지팡이는 묘비명, 흰 옷은 수의가 된다. 과거에는 시코구 순례길을 살아서 마친 사람이 드물 정도로 험한 여정이었다고 한다.

직원들이 출근하는 9시, 그는 일단 퇴근한다. 1시간여 가벼운 등산 겸 산보를 마치고 춤꾼으로서 그의 다른 일상이 시작된 것이다.

시코쿠 곳곳에서 요청해오는 강연이며 강습, 공연 기획과 준비, 무대를 위한 시간이다. ‘시코쿠 춤의 여왕’으로 사는 삶이다. 절의 공식업무를 마치는 5시, 다시 그의 업무가 시작된다.

주차장 한켠 널찍한 공간에서 익숙한 가락이 흐른다. 한무리 초보 춤꾼들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일본 현지 제자들이 묘선의 지도 아래, 한국 전통춤 연습에 한창이다. 그들은 벌써 일본에서 열리는 한국 춤 공연은 물론, 한국에서 열리는 공연에도 함께할 만치 실력을 쌓고 있다. 한류의 바탕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벌써 16년을 헤아린다. 우리가 만드는 진짜 한류는 그 나라의 문화 안에 우리 문화의 숨결을 불어 넣는 일, 시간을 두고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일이다.

 

캘리포니아주립대학(UCLA) 한국음악과 교환교수의 삶과 고짱

 

“한국음악과가 사라지는 것은 우리 음악의 민족 자긍심과 전통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그이가 몇 해 전 이명박 대통령에게 장문의 탄원서를 띄운다. 미국 대학에 한국음악과가 개설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데 벌써 40년, 해를 헤아린다. 1973년 설립부터 십시일반 교포들의 정성과 관심으로 어렵사리 운영이 이어져온 것인데, 주정부와 대학의 재정긴축으로 2000년대 중반부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금은 폐과 운운하는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김묘선은 공연기부, 강습회 개최 등을 통해 폐과를 막기 위해 안간힘이다.

“강습비는 1인당 400달러이며 강습비는 전액 UCLA 한국음악과에 기부될 예정이다. 이번 (김묘선 교수의 이매방류 살풀이춤) 강습회에 참가하면 한국 전통 문화를 체험하는 동시에 UCLA 한국음악과를 도울 수 있다.” 미주 한인신문에 난 기사다.

그가 이 대학 한국음악과와 인연을 맺은 것은 기이하게도 오구리 고에이 스님이 세상을 떠난 직후다. 상을 치르고 스님의 재산이 모두 동결되어, 겨우 수중의 돈을 그러모아 고짱과 함께 친정 동생이 있는 캘리포니아로 잠시 떠난다. 돌아오는 비행기 일정은, 이미 일본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크루즈의 선상공연으로까지 일정이 잡혀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만 비행기 시간에 착오를 일으켜, 겨우겨우 마련한 비행기 표가 휴지조각이 되었다.

‘아무것도 혼자 못하게 된 자신’을 탓하며 하늘이 노래졌지만, 어쩔 것인가.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공연일정을 제자들에게 맡기고 동생네 도움으로 미국에서 며칠 머물기로 했다. 그 때 갑작스런 연락 한 통을 받는다. ‘지금 대학 교환교수자리가 있는데, 면접 볼 수 있겠느냐?’ 캘리포니아주립대 한국음악과 김동석 선배교수에게서다. 그리고 2008년부터 민족음악과 교환교수로 학교를 찾아, 미주에 우리 춤사위를 전하게 된다. 교환교수직을 맡자, 자연 고짱의 유학비자가 허가된다.

묘선은 고짱이 문화를 넘어, 종교를 넘어, 인종을 넘어 크고 너른 길을 가기 바란다. 그래서 능숙한 한국어, 일본어, 영어 외에도 중국어, 스페인어를 공부하기 바란다. 종교가, 인종이, 문화가 인류의 역사 앞에서 걸림이 되지 않는 다음 세대의 길잡이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고짱은 묵묵히 그 바람을 실현하고 있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서 자신이 한 약속을 기억하는 탓이다.

 

 

▲문화훈장 수여

 

 

 

그의 시대, 유네스코 등재와 인간문화재의 길

 

그의 국적, 물론 여전히 한국 국적이다. 그가 한국 국적을 고집하는 것은 남편과의 약속에서부터 시작된다. 한국에서 춤의 역사를 만들어가기 바라는 남편의 굳은 바램이기도 했다. 교포의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전수교육조교로 지정된 것이 그렇고, 1200년 대일사의 역사에 한국인 주지로 이름을 올리는 것도 그래서 더욱 의미가 깊다. 일본과 미국, 한국을 오가는 그의 삶은 대한민국 정부도 움직였다. 지난 2011년 10월 15일 강릉에서 열린 ‘문화의 날’ 행사에서 문화훈장을 받게 된 것이다.

그에게 남은 스승은 이매방 선생이 유일하다. 그를 이매방 선생에게 추천한 김천흥 선생도, 최현 선생, 김진걸 선생도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도 이제 천천히 자신의 시대를 준비한다.

그가 춤에 인생을 맡긴지 40여년이 흘렀다. 그의 인생은 승무와 같다. 그저 한국의 전통으로, 문화로, 예술로, 벼려온 춤의 결이었다. 그런데 이제 종교로 승무를 체득하기 이른 것이다. 번뇌를 거쳐 해탈에 이르는 길을 고스란히 춤으로 옮긴 승무, 그 길이 바로 자신의 길이었음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승무를 완성하는 마지막 고리를 찾은 것이다. 그 앞에는 승무와 살풀이춤의 유네스코 등재라는 숙제가, 인간문화재라는 커다란 과제가 여전히 남아있다.

 

하늘과 땅, 사람 사이를 정과 동, 경과 중, 맺고 풂의 춤사위로 화해시키다

 

“이 땅에 무용가는 꽃 종류만큼이나 많다. 아니 흔하다. 그러나 진정 꽃의 향기와 꽃의 넋과 그 순수성을 지키는 사람은 흔치 않다. 춤을 교태와 미소와 아양으로 분칠하여 손끝 기술로만 오인하는 무용계의 실태를 돌아볼 때 때로는 구역질이 날 때도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혼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 그런 가운데 김묘선은 그 전통의 순수를 지키며 혼이 담긴 착실한 기교와 절제의 묘를 살리면서 인간냄새가 나는 삶을 무대 위에서 보여줄 뿐이다. 곡식은 여물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다. …… 그런 가운데서 한일 양국의 친선과 이해를 위해 헌신하는 그 모습은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무용가 김묘선을 느티나무로 표현하는 나의 심정은 결코 허세도 과장도 아니리라.” 2004년 11월 17일 일본 발표회에 맞춰 극작가 차범석 선생이 지은 글이다.

인천시 부평구 작은 아파트 거실, 살풀이 춤사위가 흐느끼는 가락 사이를 매우고 흐르고 있다. ‘허이~’ 그 춤사위의 틈을 또 한 강단진 소리가 채우고 있다. 그가 제자의 춤을 살피는 시간이다. 일곱 살부터 그의 문하에서 춤을 배워온 30년 제자 김명주(37세)다. 손끝 매무새 하나하나 그의 맵짠 눈길이 머문다. ‘호흡을 크게 하고 대삼과 소삼, 변화를 줄 때는 분명한 변화를 주어야 해’ 그의 손길에 제자의 머리 끝부터 버선 끝까지 선이 고와진다. 그는 한국, 일본, 미국을 오가는 일정 가운데 이곳 인천을 허브로 삼아, 제자들의 춤사위를 살펴주고 있다.

 

여전히 그의 손에는 명주천이 들려있다. 1200년 고찰 대일사의 주지이지만, ‘스님’하고 누가 부르면, 주위를 둘러보며 스님이 어디 계신가, 찾는 춤꾼으로 삶이 더 분명하다. 아들 고짱이 스무 살 법적 성인이 되어 주지직을 승계하고 나면, 그의 삶도 다시 변화를 겪을 것이다. 그 때까지 그의 삶은 여전히 예술과 종교를 스스로 안에서 조화롭게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인종을, 종교를, 문화를 넘어 하늘과 땅, 사람 사이를 정과 동, 경과 중, 맺고 풂의 춤사위로 화해시킬 천상 춤꾼이다.

 

 

▲거문고 산조
▲무당춤
▲살풀이춤
▲지전무


이대건 eampark@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