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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 2009. 9.12(토) 20:0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엄지인 아나운서
▣연출 : 고정훈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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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1년,백제판 10.26사건이 발생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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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왕 피습사건은 백가의 단독범행인가? |
475년, 백제는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고구려군의 침공에 수도 한성이 함락되며 개로왕이 죽고, 연이어 2명의 왕이 귀족세력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이런 상황에서 동성왕이 14세의 나이로 즉위한다. 동성왕은 신진세력을 등용하며 왕권 강화에 나서는데, 돌연 전 경호실장 백가에 의해 시해당하고 만다. 그러면 백가는 왜 왕을 죽였을까? <삼국사기>는 동성왕이 백가를 지방으로 전출시키자 그가 앙심을 품고 왕을 살해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동성왕 시해 후 백가의 행적을 고려할 때 동성왕 피습이 과연 그의 단독 범행이었는지는 많은 의문이 남는다. 동성왕 피습 사건에 얽힌 비밀을 파헤친다. ![]() ![]() | |
▲백제 공주 공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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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백제 왕이 일본에서 오는가? |
<일본서기>에는 동성왕이 일본에서 왔다는 기사가 보인다 |
4월 왕이 죽었다. 곤지왕의 다섯아들 중 둘째인 말다왕이 유년에 총명하므로... 군사 500인을 자기 나라에 호위하여 보냈는데, 이 사람이 동성왕이 되었다.(일본서기 웅략23년조) |
동성왕 뿐 아니라 그 뒤를 이어 즉위하는 무녕왕도 일본에서 자란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동성왕 즉위 3년 전 백제는 한성을 잃고 고구려 군에 의해 왕가가 몰살되는 참변을 겪는다 |
개로왕 을묘년 겨울 고구려 대군이 와서 대성을 7일 낮밤을 공격하자 왕성이 함락되어 위례를 잃었다. 국왕 및 태후, 왕자 등이 다 적의 손에 죽었다.(일본서기 웅략 20년 조) |
그로부터 3년 뒤 동성왕이 즉위했다는 것은 왕족 몰살 당시 동성왕이 살아남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녕왕은 어떤가? 무녕왕릉 묘지석과 <일본서기>에 비추어 추측하면 그는 461년 일본 각라도에서 출생한 것으로 보인다.즉,동성왕보다 세 살 더 많은 이복형인 것이다.따라서 한성 함락 당시 무녕왕과 동성왕은 왜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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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학교 소진철 교수는 백제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왕과 그의 세력들이 살았던 오사카 간논즈카의 고분 규모에 비추어 당시 곤지계가 규슈, 오사카 일대를 무대로 야마토 왜의 주요 정치세력일 가능성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곤지의 아들인 동성왕과 무녕왕은 백제가 파견한 왕자들로서 야마토 왜에서 주요한 정치세력을 형성하였고, 본국 백제가 위험에 빠지자 백제로 돌아와 왕이 된 것이라 볼 수 있다.웅진 백제 시기, 한반도와 일본 열도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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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녕왕이 사건의 배후인가 |
<일본서기>를 다시 한 번 살펴 보자. |
서기 502년, 백제 말다왕이 무도하여 백성들에게 포학했으므로 나라사람들(國人)이 마침내 제거하고 도왕을 세우니 그가 바로 무녕왕이다(일본서기) |
여기서 말다왕은 동성왕을 의미한다.그러면 그를 제거한 ‘나라사람(國人)’들은 누구일까? 동성왕 대 백제의 제 1과제는 고구려에 뺏긴 한성을 수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성왕은 한성 수복을 위한 대 고구려 전에 소극적이었다. 이것은 국내 정치적으로도 한성 백제세력에 등을 돌리는 정책이었다. 또한 동성왕은 초기 왕권강화 과정에서 백제로 함께 건너온 왜계 백제 세력을 배제하였고, 사비천도를 계획하며 웅진세력인 사씨와 백씨의 반감을 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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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형성된 반 동성왕 세력들의 연합이 백가를 사주한 것이 아닐까? 무녕왕은 최소한 그 구심점이 아니었을까? 무녕왕이 동성왕 피습의 배후에 있었다는 것은 전적으로 역사적 가설이다.그러나 무녕왕 대에 와서 백제의 정책이 달라진 것만은 확실하다.무녕왕은 동성왕과는 달리 두가지 국가 과제에 자신의 운명을 걸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백제의 염원인 한성 수복을 위해 대고구려 전쟁을 시작하였고, 야마토 왜와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다져나갔던 것이다. 동성왕 피습은 단순한 정치적 암투의 결과물이 아니라 백제사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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