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군 공음면 석교리 개갑에는 고창지역 최초의 천주교 순교의 현장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1801년 신유년에 마티아 최여겸이 참수를 당한 곳이지요.
개갑은 아래로 석교포가 있어 무장현의 관아와 전남 내륙으로 수산물을 공급하던 중요한 시장이었습니다.
개갑장터는 구한말까지 흥하다가 일제강점기에 폐쇄되었습니다.
특히 개갑장터의 설립은 영모당 김질과 관련이 깊습니다.
영모장 김질선생의 아버지는 꿩고기를 무지 좋아하셨는데, 돌아가신 게절이 겨울이었습니다.
그래서 영모당 아버지의 제사는 늘 큰 눈이 내렸고, 그는 눈길도 아랑곳 하지 않고
제사 음식을 구하러 멀리 안자시장[현 해리시장]까지 가서 꿩고기를 사왔습니다.
이런 영모당(永慕堂) 김질(金質)[1496~1561]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한
무장 원님이 개가리에 장을 세워 주었다는 효행 이야기가 전합니다.
개가리 장터는 일제 강점기에는 의병 활동의 거점이 되었기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쇄되었다고 합니다.
입구에는 위의 개갑성지라느 안내판과 함께 거석에 개갑순교성지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인근에는 최여겸에 대한 순교성지를 소개하는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최여겸의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세례명은 마티아, 여겸(汝謙)은 자라고 합니다.
그는 무장현 동음치면[현 고창군 공음면]에 거주하고 있던 전주최씨 현감공파의 후손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최여겸은 25세 때인 1788년(정조 12) 유항검을 찾아가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후에 충청도 한산으로 장가를 가서
이존창을 만나 교리를 배우면서 신앙심이 두터워졌습니다.
고향 무장으로 돌아온 그는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여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습니다.
신유년인 1801년(순조 1) 정월 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다시 처가가 있는 한산으로 피신하였으나 발각되었습니다.
한산관아에서 심한 고문을 받았으며, 무장으로 이송된 뒤 다시 전주감영으로 옮겨졌다가 또다시 서울 형조로 압송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배교(背敎)를 강요당하며 심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습니다.
신앙을 끝까지 지키자 형조에서는 다시 무장으로 이송하여 개갑장터에서 7월 19일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습니다.
그는 당시 38세였습니다.
개갑장은 영광 법성포가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또 장터 바로 앞에 석교창이 있어 배가 드나들었습니다.
또한 섬 등에서 키운 소를 배에 싣고 와 파는 우시장이 설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전합니다.
이때 최여겸의 가르침을 받고 천주교도가 된 신자들도 함께 붙잡혀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최여겸에 의해 신자가 된 사람이 모두 28명에 이른다고 밝혀졌습니다.
그 중 확인되는 경우는 무장의 최수천[횡성에 유배], 최일한[전주에서 형벌로 죽음],
흥덕의 김처당[청도에 유배], 영광의 이화백[영광에서 순교], 함평의 남중만[평산에 유배] 등이 있습니다.
2010년 최여겸은 ‘순교자 124위와 최양업 신부 시복시성’ 대상자에 선정되었습니다.
박해 이후 최여겸과 그 신자들의 후손들은 그 후 박해로 인해 모두 피하여 흩어졌기 때문에
그 후손들을 찾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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