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야기

시코쿠 도쿠시마의 대일사 주지 김묘선누님을 만나다.大日寺の住職さん

백강 문정사랑 2010. 8. 12. 10:04

 

 

여름 일본 시코쿠의 도쿠시마를 가서 알게 된 것이

바로 대일사라는 순례사찰의 주지가 한국인이고 여성이라는 사실에 많이 놀랬다.

 

2010年の夏に四国徳島に行って、新たに知って驚いたことがある。

大日寺という四国88ヶ所巡りにも含まれている有名なお寺の

 住職さんが韓国人だった。

 

 

아내가 이곳에 유명한 한국인이 있다고 해서 만나보고 싶었다,

내가 아는 도쿠시마의 유명한 한국인은 세명이 있다.

그 중 일본국내에 알려진 인물로 바로 대일사의 주지이신 무용가 김묘선씨이다.

 

 

うちの奥さんが、近所に有名な韓国人がいるというので会ってみたくなった。

徳島の有名韓国人は三人いるが、全国区で一番有名なのはまさに、

その大日寺の住職をなさっている韓国人舞踊家金昴先さんだろう。

 

전화를 했을 때는 무척이나 바빠 2일이 지난 아침에야 만날 수 있었다,

활기차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일품인 김묘선씨를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나와 아내는 장인 어른을 모시고 함께 대일사를 갔다.

그곳은 묘자이군과 도쿠시마의 경계지역에 있는 아름다운 하천이 흐르는 강변에 위치한 절이었다.

집에서 절까지는 15분이면 갈 수 있는 근거리였다.

 

通話中からしてとても忙しそうで、二日後の午前中に会う約束をした。

活力に満ちた、でも柔らかな会ってみたいと思わせるような声だった。

 

奥さんと義父といっしょに大日寺に行った。

そこは徳島市と名西郡の境にある美しい川が流れる河川沿いにある寺だった。

奥さんの実家からそこまで15分もあればいけるという近さだった。

 

 

대일사는 시코쿠의 88 순례절로 그 중 13번째의 절이다.

그래서 매년 수십만명이 이곳을 방문한다고 한다.

우리는 가는 도중에도 많은 분들이 걸으면서 순례하는 것을 본다.

 

大日寺は四国88か所めぐりのお寺の中で

13番目の札所だった。

毎年数十万人もの巡礼客がここを訪れる。

自分達が行く途中にもたくさんのお遍路さんが歩いているのが見えた。

  

 

대일사의 사무직원의 안내로 우리는 김묘선씨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사적인 여러 이야기를 하였고, 나는 이분과 짧은 만남 속에서도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간단히 차 한 잔에 시간을 마무리 할 수 밖에 없었다.

너무 아쉬웠다. 김묘선씨가 이미 강의할 시간이 되어가기 때문에 더 이상 시간을 낼 수 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 3일 후 저녁을 함께 하자고 하셨다.

 

大日寺の事務員さんの案内でお部屋に通されて、金昴先さんに会った。

私的な話を幾つかして、短時間だったが深い話ができたと思う。

なにしろお忙しいので簡単にお茶一杯でお別れするしかない。

すごく残念だった。

すでに金昴先さんの講義の時間になってしまっていたので。

 

そうすると3日後にもう一度会って

夕食を一緒に食べましょうと言ってくれた。

 

 

 

3일이 지나 연락을 통해 우리 가족들과 다시 만났다,

일본식 우동을 먹으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분의 삶.....

 

三日が過ぎて、連絡がきて、うちの子供たちも一緒にお会いした。

日本式のうどんを食べながら、いろんな話を聞かせていただいた。

 彼女の人生、、、

 

그러나 나를 제일 감동시킨 것은 남편분이 돌아가시고 난 뒤 남편 분과 더욱 애틋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더욱 그립고 그동안 자신과 살면서 얼마나 자신을 사랭해주었는지를 알았다고 한다.

 하긴 그렇다.

사람이 함께 있을 때는 귀한 것을 모른다.

나는 아내를 보면서 나두 김묘선씨 처럼 아내에게 그리움과 사랑의 애틋함을 느끼게 할 수 있을지 하는 생각이 든다.

함께 있을 때,

함께 살 때 더 아내를 사랑하고 아껴야 함을 느끼게 한다.

 

しかし自分が一番感動したのは

ご主人が亡くなった後、

ご主人との間に生前よりさらに深い愛の世界を感じているということだった。

そしてより愛しく、今まで、一緒に暮らしながら

 どれだけ自分と子供を愛してくれたのかということを

知ったということだ。

 

たしかにそうだ。

人はそこに一緒にいるとき、そのありがたみが分からない。

自分も金昴先さんのように、妻が愛しさと愛情を感じられるように

してあげられるかなと、妻を見ながら考えた。

共にいるとき、共に生活するとき

奥さんを愛して大事にしようと思った。

 

 

김묘선님

나는 그 분에게 어떻게 불러야 할 지 몰라 고민을 하다가.

우리 큰 누나보다 젋기 때문에 단 하나의 말.

누나였다.

그리고 난 김묘선씨에게 누님이라 불렀다.

누님은 누님이 직접 받을 수 있는 연락처를 주시면서 자리를 마감하였다.

도쿠시마에 오면 또 보자고 하신다.

감사합니다.

아리가도 고자이마스

 

金昴先様

 

なんとお呼びしたらいいのか。

自分の一番上の姉さんよりもお若いので

ただ一言。

おねえさん

 

だから金昴先さんをおねえさんと呼びます。

御自分のプライベートな電話番号まで教えてくださって

その場を去っていかれました。

徳島に帰ってきたらまた会いましょうと言ってくださった。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이분에 대한 기사가 있어 그대로 올려봅니다.

この方に関する記事をつけておきます。

이 기사는 세계일보에 나와 있네요.

◇한국인 무용가 김묘선씨는 일본에서 삭발하지 않은 최초의 스님이 됐다. 일본 양대 종단의 하나인 진언종은 세계적인 무용가인 그의 활동을 인정해 장발을 허용했고 법명도 본명을 그대로 쓰도록 했다.

그가 ‘승무’를 추지 않았더라면 스님이 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한국 승무와 살풀이춤의 전수교육조교(준문화재)로 지난 4월 일본 천년사찰의 주지 스님이 된 한국무용가 김묘선(52)씨. 그의 춤에 반한 ‘대일사’(大日寺) 주지 오구리 고에이 스님과 부부의 연을 맺고 2007년 별세한 남편의 뜻을 이어 스님이 된 것을 그저 ‘운명’이란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제자의 주지 취임식에 참석한 그의 스승 이매방 선생은 “나는 스님이 안 돼 봤는데, 네가 진짜 스님이 됐으니 승무를 춰도 이전과는 다를 것”이라고 눈물을 흘렸다. 전화 인터뷰를 통해 만난 김씨는 “과거 일본에 불교를 전파했던 백제 승려들처럼 승려와 무용가로서 한국과 일본 간 다리 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다.

◆춤과 종교수행은 둘이 아닌 하나=일본에서 스님은 결혼할 수 있고 사찰은 세습되는 개인자산인 까닭에 김씨가 남편의 뒤를 이어 스님이 되겠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대는 극심했다. 대일사는 진언종 산하 일본 시코쿠(四國) 지역의 88개 유명 사찰 중 하나로 최근 일본에서 큰 인기를 모으는 ‘시코쿠 불교 성지순례’의 핵심코스다. 연간 30만명의 순례객이 참배를 오는 고찰을 외국인 여성에게 맡기지 않겠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먼 일가에선 종단에 투서도 보냈다. 하지만 매일 두세 시간만 자며 시험 준비를 했다는 그는 8개월 만에 스님 자격시험을, 1년 만에 주지 자격시험을 통과하며 주변의 반대를 잠재웠다.

춤으로 한일 문화 가교 역할을 해온 그는 “춤과 수행은 둘이 아닌 하나”라고 했다. 춤은 불교의식 수행을 돕고 승려의 삶은 춤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실기시험 중 450개의 작법(불교의식의 골자인 재(齋)를 올릴 때 추는 모든 춤의 총칭)시험이 있는데, 무용 덕을 봤다. 또 스님이 된 후 추는 승무는 이전과 다른 세계를 열어줬다. “‘승무’는 속세를 버리고 스님이 되는 과정의 번뇌를 잊기 위해 법고(북)를 두드리는 청년의 마음을 그린 춤인데, 그 춤 속으로 들어간 셈”이라면서 “승복을 입으니 걸음걸이도 달라지고 저절로 손이 올라간다”고 했다.

스님과 결혼한 이후에도 해외 공연과 한국을 오가며 춤에만 몰두했던 그가 스님이 된 것은 남편과 아들의 간곡한 청 때문이다. 남편은 “당신은 무용가로서 성공했으니 이제 스님 자격을 따놨으면 좋겠다”는 말을 유언처럼 남기고 2시간 후에 뇌경색으로 쓰러져 운명했다. 평소 한국말로 대화하며 “난 한국사람”이라고 밝히던 열살 난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 후 “아빠처럼 스님이 되겠다.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엄마가 절을 지켜 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두 살 때부터 법당에서 경을 공부해온 아들한테 ‘반야심경’을 배웠습니다.”

◆순례자들 위무해줄 수 있는 승려 될 것=버선발에 피가 배어날 정도로 연습벌레였던 춤꾼의 굳은살은 수행의 기초체력이 됐다. 그는 주지에 취임한 이후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법당에 불을 밝히고 법회를 준비하는 일이 “평생 해온 듯 편하다”고 했다.

2005년 이매방의 전수조교로 선정됐고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일본 간사이 지부회장을 맡은 그는 현재 미국 UCLA대학 교환교수로 한국 춤을 가르치고 있다. 오랜 강의 경력 덕에 마이크만 잡으면 술술 말이 나온다는 그의 설법을 듣고 나면 사람들이 눈물을 흘린다. 그는 “대단한 깨달음을 전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 진솔한 삶의 이야기만으로도 울림을 주는 모양”이라고 해석한다.

특히 NHK 및 민간 지방 방송사에서 지난해 봄부터 그를 주인공으로 한 ‘주지 스님은 춤꾼’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일본 전역에 방영하면서 그는 대일사의 보물이 됐다. 다큐를 본 참배객들이 함께 기념사진을 찍어 달라는 요청이 끊이지 않는다. 교도소의 수인들로부터 편지도 받고 영화제작사로부터 영화제작 섭외도 받고 있다. 그는 “무용 인생이 거울을 들여다보는 삶이었다면 주지는 창문을 내다보는 삶”이라고 표현했다. “주지는 사람들의 가슴앓이를 들어주고 풀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엔 거울을 통해 내가 잘되기만 기원했다면 이제 창문으로 지나가는 아픈 사람들을 위무하고 싶어요. 비에 젖고 바람에 흔들리며 몇 달씩 순례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기 위해 나를 버리다 보니 홀로 눈뜨는 아침조차 평온하게 느껴집니다.”

생활불교인 일본 사찰은 마을의 경조사를 주관하며 삶과 죽음에 관계한다. 옛날엔 사찰이 지역 주민의 족보와 호적을 관리하며 스님이 있어야 제사와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김씨가 주지로 있는 대일사와 부속 국중사는 300개 가정을 관리한다. “승려들의 역할은 산속에 은둔해 도를 닦고 성불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면서 “결혼식과 장례식, 제사, 탄생일에 직접 가정을 방문해 법회를 열어준다”고 했다. “한국의 장례문화는 시신을 병풍 뒤에 차단해놓고 무서움의 대상으로 취급합니다. 일본은 입관 때까지 ‘시신’이 아닌 ‘환자’로 여기며 기도를 올리죠. 유가족들도 울고불고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데, 생활 속에 깃든 불교사상의 힘인 것 같습니다.”

 

徳島県で「住職は舞姫」と話題を呼んでいる韓国人女性がいる。お遍路で有名な四国88カ所霊場で唯一外国籍の住職、金昴先さん(キム・ミョソン、52)がその人。恒例の夏の阿波踊りで金さん率いる舞踊団が韓国舞踊を演じ、地元の韓日交流に一役買っている。「住職と舞踊家」を両立させている金昴先さんは、地元で知らない人はいないほどの有名人だが、そこに至るには人知れない努力もあった。いまの願いは、「生涯を通じて韓日交流の懸け橋」になることだという。今の心境などを聞いた。

 今月16日の阿波踊り後に「韓国舞踊特別公演」が行われ、金昴先舞踊団のメンバー40人は、約800人の観客に華麗な舞いを披露した。特に、金さんの舞う芸術性の高い「僧舞」は観客を魅了、会場は大きな拍手に包まれた。人生とは不思議なものだ。金昴先さんは10歳の頃から伝統舞踊一筋で、19歳で人間国宝の李梅芳(イ・メバン)師匠に師事、師匠亡き後の人間国宝に指名されている一流舞踊家だ。それが日本でお寺の住職になった。

 きっかけは1995年に徳島で舞踊公演した際、宿泊先の大日寺での大栗弘栄住職との出会いだった。一目惚れ同然に翌年結婚、長男・弘昴(ホンミョ)君が誕生。しかしその後、07年4月に住職の夫が急死、昴先さんは「韓国に帰りたい」と弱気になった。だが、息子の弘昴君が「僕は父さんのような僧になりたい。20歳になるまで母さんが守って」と訴えた。

 決意は固まった。同年7月、得度(出家して受戒すること)して尼僧になり、同じ宗派(真言宗大覚寺派)の僧の指導で1から勉強。夫が弟子に読経の指導をしているときに録音したテープを丸暗記するなど寝る間を惜しんでの猛特訓が続いた。そして昨年12月に住職に就任した。

 「人間国宝の後継者になるためには厳しい修行が必要なのと同様、お坊さんになるにも、厳しい修行が必要だ。お経の梵語だけでなく作法なども覚えなければならず、日本のお坊さんの何倍もの努力を要した。例えば、目で見ていたらお経が遅れる。目で瞬間的に読むためには完全に暗記する必要があった。この2年間は4時間以上寝たことがない」

 住職の日常は厳しい。午前3時に起床し、お遍路さんに話す法話の準備を始める。その後、本堂で読経。朝食後はお遍路さんの受付や檀家の法事と続く。住職と舞踊家を両立させるのは大変だ。

「韓国舞踊とお坊さんの修行は別物ではなく、私自身の中では踊りと僧を両立しているとの感じはない。韓国の舞踊家からは『僧侶になって踊るのだから、本当の僧舞が踊れている』と言われた。踊りが完成した思いであり、住職になって本当に良かった」

 舞踊が本職で、1988年に金昴先舞踊団を結成、李梅芳師匠らとともに世界各地を公演した。

 「100カ国ぐらいで公演した。韓国舞踊は衣装が華やかで品があり魅力的だ。また、打楽器もあり、リズムもいけるので、どの国でも反応はすごく良かった」

 18歳年上の大栗住職と結婚については周囲の強い反対があった。

 「アボジ(父親)だけは私を信じて反対しなかった。アボジは九州の大分県生まれで、日本が大好きだった。住職にはカリスマがあり、これ以上素晴らしい人との縁はないと思った」

 金さんは最初から徳島の社会に受け入れられたわけではない。むしろ様々な差別を受けた。

 「12月4日に愛媛県松山市で四国33観音霊場会講師として3000人の前で説法する予定だ。これは私を名実共に住職として認めるものだ。徳島も最初は閉鎖的で、住職になった時も最初は『外国人住職などとんでもない』と無視され、出て行けとも言われた。涙を流したこともある。いまは認めてくれ、愛されている。異物を受け付けようとしなかった社会も変化し、むしろ良さを認めるようになったのは何よりも嬉しい」

 願いは「韓日交流の架け橋」になることだ。

 「最初は踊りだけで交流と考えていたが、いまは仏教交流に力を入れている。大日寺は30年ほど前から韓国の曹渓宗と姉妹血縁し交流を続けており、韓国からのお参りも多い。私は徳島県の観光協会の理事も務めているが、韓国の観光客誘致にも力を入れたい。架け橋になることは山のようにあると思う。よく外国人1号の住職と言われるが、私が死んだら骨を埋めるのはここ。アジアは一つであり、今日国境に意味はない。徳島県人の住職と見てほしい」

 金昴先さんの活躍は、韓日をより良い社会へと着実に変えていっているよう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