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동학농민혁명과 영학당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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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을 말하라면 동학농민혁명이라 할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은 조선조 말 중세적인 체제 모순을 개혁하고, 조선조 수취 체제의 문란으로 핍박받고 있던 힘없는 백성들이, 수탈의 폐해를 혁파하고 신분 차별을 타파하여 안정된 삶을 얻고자 일어났다. 한편으로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간섭과 침략에 맞서 저지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19세기 후반 조선이 처한 체제 모순과 외압의 시대적 조건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의 변혁 운동 가운데 당시의 시대적 역사 과제를 가장 올바르게 인식하였던 변혁 운동이었다. 이러한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11월초 공주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거의 끝났으나,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군 지도부가 체포된 이후에도 수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항전이 이듬해 1월까지 계속되었고 1895년 7월까지도 산발적인 항전은 진행되었다. 그 후 동학농민혁명의 불이 꺼지자 우리 고창사람들은 1895년 이후의 농민혁명의 역사는 기억하기조차 싫었나 보다.
그들은 1898년 가을부터 일본에 대한 미곡 수출을 반대하는 등 현실문제에 관심을 표명하였다. 이 영학당의 조직 중 가장 먼저 봉기한 곳은 흥덕이었다. 흥덕의 영학당 두령 이화삼(李化三)은 1898년 12월 300여 명의 농민들을 이끌고 관아에 들어가, 민회(民會) 형식으로 농민들의 의사를 모아 군수를 내쫓았다. 흥덕에서의 영학당 봉기는 흥덕군수의 탐학에 그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봉기는 사흘 뒤 광주(光州)에서 파견된 관군에 의해 진압되고, 두령 이화삼 등은 체포되었다. 이화삼이 붙잡힌 뒤 영학당은 1899년 5월 4일 흥덕에서 호남공동대회(湖南共同大會)를 열고 이화삼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화삼은 석방되지 않고, 5월 27일 광주로 극비리에 이송되었다. 이같은 사실을 알게 된 영학당 농민 400여 명은 그날 밤 고부에서 봉기하여 고부군아를 점령하고 무기를 탈취하였다. 그런 다음 그들은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왜양(斥倭洋)’을 위하여 봉기하였음을 방문을 통하여 천명하였다. 이들은 이어 흥덕과 무장의 관아를 습격하여 점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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