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의 당산나무를 살려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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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앞을 내리자 그곳에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서있었다. 역 앞의 도로는 2차선의 도로가 개설되었는데, 역을 바로 지나자마자 길은 갑자기 폭이 250cm 정도로 좁아진다. 겨우 차 한 대 다닐 정도의 좁은 길이다. 지금은 어떨까? 2010년 겨울에 갔을 때도 그 길은 그대로였다. 왜 일본인들은 좁은 그 길을 넓히지 않았을까? 답은 바로 그곳의 커다란 나무였다. 직경이 아마 120cm은 됨직한 나무였다. 그렇다고 그 나무가 한국의 당산처럼 신성시하거나 숭배의 대상은 아닌 듯하다. 그런대도 나무가 크다는 이유로 보호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당산문화는 미신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시대 유학자들로부터 철저하게 짓밟히기 시작하였고, 그 절정을 이룬 것이 근대화라는 이름의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었다. 그리고 40~50여년이 지난 지금 당산은 농촌의 두레와 농악 등과 어우러진 한국문화의 정수로 등장하였다. 고창에도 오래된 마을이라면 어느 곳에나 위와 같은 당산문화가 있었다. 또한 마을이 풍수적 결함이 있다면, 그곳에는 어김없이 당산이 자리를 잡고 있다. 특히 마을이 북쪽과 서쪽을 바라보는 방향에 자리를 잡고, 앞이 훤하게 막힌 곳이 없다면, 이를 흉(凶) 또는 허(虛)한 곳이라 한다. 하여간 당산은 지형적으로 완벽한 공간이 거의 없기에, 부족한 곳을 도와서 모자라는 것을 채워준다는 비보사상(裨補思想)의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미신이라는 이름으로 조상들의 사고를 무시하고 있다.
지금 살아 있는 세 그루의 나무들도 그 생명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상거리당산의 며느리당산은 가정집에 있어 더 이상 손을 대지 않기 때문에 온전히 자라고 있다. 그러나 하거리의 아들당산은 주민들이 나무의 가지들이 지붕을 덮는다고 마구 잘라 점점 고사되고 있다. 특히 하거리의 며느리당산은 당산 주변의 주민이 가지를 너무 잘라 결국 고사되고 말았다. 물론 교촌당산의 할머니와 아들 및 며느리 당산, 중리와 중거리의 아들과 며느리 당산도 고창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쓸쓸히 고사되거나 잘려나가고 말았다.
20여 년 전인가? 공주에서 한 그루의 괴목을 옮겨 살리면 1억을 주겠다고 하여 한 업자가 덤벼들었다가 나무가 죽어 공사비도 못 받고 말았다. 공주시가 어리석어서 그렇게 하였을까? 지금 이와 같은 당산나무는 수천만원을 호가한다. 고창군이 이러한 나무들을 사다가 다시 심는다면 수억은 들 것이다. 당산이 죽고 난 후 다시 당산나무를 사다 심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것일까? 당장 당산나무 주변의 도로를 좁히고 당산의 뿌리 부근을 반경 2m 이상으로 넓혀야 한다. 최소한 나무가 가지를 펼치고 있는 공간까지는 지표(地表)가 드러나야 하지 않겠는가? 나무가 숨을 쉬고 뿌리에 물이 들어가고, 그 사이사이에 수많은 미생물들이 공생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도로도 좁은데, 도로를 뜯어내라고”라며 욕을 할지 모른다. 차는 돌아가면 된다. 조금만 다시 도로의 설계를 변경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중리의 할머니당산을 살리는 것이 고창의 문화와 역사를 살리는 길이다. 할머니당산이 시름시름 앓고 있다. 시름시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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