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 이후 마한 백제문화로의 초대
Ⅰ. 머리말
전라북도 서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고창군은 산과 바다, 그리고 넓은 평야가 펼쳐진 지역으로서 선사시대부터 인간이 생활을 영위하기에 매우 적합한 환경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고인돌을 비롯한 많은 문화유산이 전 시대에 걸쳐 남겨져 있어 고창의 문화적 전통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고인돌 문화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분묘유적으로서 거석문화의 한 단면을 살필 수 있는데, 그 규모나 군집양상에서 사회 발전단계를 논의하는데 매우 유의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한반도의 고인돌문화 가운데에서도 고창지역의 고인돌은 그 유형의 다양함과 분포 양상에서 다른 지역의 것들과 차별성을 가지고 있어 더욱 주목되고 있다. 분묘유적이라는 기본적인 시각을 뛰어넘어 선사시대인들의 예술성과 그에 바탕하는 정신세계를 담아내고 있기 때문에 고창 고인돌의 가치는 한국인뿐만 아니라 온 세계인의 문화유산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와 같이 다양하고 뛰어난 고인돌을 축조한 집단은 어떻게 변화되어 갔으며 시대가 흐르면서 어떠한 문화유산을 남겨 놓았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최근 고고학적인 발굴조사를 통해서 찾을 수 있는데, 곧 마한과 관련된 문화유적의 발견이 그것이다.
마한에 대한 기록은 중국측 사서인 三國志 나 後漢書 의 東夷傳에 소략하게 나타나 있는데, 우리의 고대 사서에서는 이를 인용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한에 대한 이해는 문헌보다는 고고학적인 물질자료를 통해 추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최근 조사된 고고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고창지역의 마한과 백제문화의 성격과 특징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Ⅱ. 고창지역의 마한·백제문화
마한은 54개 소국으로 구성된 정치체로서 고창지역은 그 가운데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에 비정되고 있으며, 백제시대에는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 또는 모량현(毛良縣)으로 불렸다. 고창지역의 마한문화에 대해서는 서해안고속도로 건설구간내의 발굴조사에서 집자리와 분묘유적이 잇달아 발견됨에 따라 주목받기 시작한 이후 각종 도로나 건설공사와 관련된 구제발굴을 통해 점차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편 백제시대 문화유적은 과거 마한과 백제의 문화적인 정체성이 확립되기 이전에는 두 정치체간의 유적이 뚜렷이 구분되지 않아 혼동되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 집자리나 분묘유적의 경우 성격이 다른 유적과 비교해서 보면 그 지속기간이 길기 때문에 유구의 속성보다는 이곳에서 출토되는 토기를 비롯한 유물을 통해 백제문화의 단면을 읽어낼 수 있기도 하다.
1. 집자리 유적
고창지역에서 조사된 마한 집자리들은 교운리 44기, 신덕리 30기, 신송리 13기, 우평리 8기, 낙양리 2기, 성남리 10기, 봉덕 56기, 석교리 12기, 부곡리 26기, 오호리·신지매 16기, 남산리 65기 등 모두 217기가 보고되었다. 이들 유적들은 모두 도로공사나 농공단지 등을 조성하면서 구제발굴이 이루어진 것들이기 때문에 실제 유적 전체를 조사한 것이라 볼수 없다. 따라서 더 큰 규모의 취락이 형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그 시기는 대체로 기원후 3세기에서 5세기에 걸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고창지역에서 발견된 집자리들은 마한지역에서 발견된 것들과 같이 지면을 낮게 파고 축조한 이른바 수혈 집자리로서 보편적 속성을 공유하고 있다.
먼저 입지를 보면 낮은 구릉의 남동사면을 주로 이용하지만 때로는 북사면에 위치하고 있기도 하다. 평면형태는 거의 방형을 이루고 있는데 경사면에 위치한 관계로 하단부가 유실된 경우도 상당수 보이고 있다. 내부시설로는 부뚜막과 도랑시설, 기둥을 설치했던 구덩이 등이 발견되고 있다. 부뚜막시설은 두 종류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점토로 노벽을 만들고 별도의 배연시설이 없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노벽을 만들고 벽에 붙여 배연시설을 만들고 있는 형태이다. 한편 집자리는 지면을 파고 축조한 관계로 집 안에 들어오는 물을 밖으로 배출할 필요가 있었을 것인데, 벽의 가장자리에 도랑을 파고 이를 외부까지 연장한 도랑이 발견되고 있다. 마한계 주거지의 내부시설에서 보이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4주공에 확인되는 것인데 이러한 주공이 확인되지 않는 것도 있다.
집자리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주로 토기로서, 그 기종으로는 장란형 토기, 발형토기, 완, 이중구연호, 단경호, 옹 등이다.
백제시대 집자리는 마한의 것들과 구조나 규모면에서는 차이가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집자리에서 출토되는 유물을 통해 그 시기를 구분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를 구분할 수 있는 표지적인 유물로는 삼족기, 직구호, 광구호, 고배, 개배 등 경질토기로서 전형적인 백제토기라 할 수 있다. 고창지역의 집자리에서 고배가 발견된 경우는, 신덕리 Ⅲ-B, 남산리 18호, 21호 집자리에서이며, 교운리, 우평리, 낙양리, 성남리Ⅴ유적에서는 극소수의 경질토기편이 출토되었다.
이와 같이 마한과 백제시대의 집자리가 구조적인 측면에서 차이를 보이지 않은 이유는 주거라는 생활환경은 자연환경이 크게 바뀌지 않는 한, 정치적인 이유에서는 바뀌지 않기 때문으로 지속기간이 길게 유지되는 특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된다.
2. 분묘유적
이 지역에서 마한과 관련된 최초의 조사는 1970년대 전영래 선생에 의해 송룡리와 신월리에서 대형 옹관과 출토유물의 보고가 그것이다. 이후 본격적인 조사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서해안고속도로 건설을 비롯한 각종 구제발굴과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의 분구묘 측량조사와 문화유적분포지도 작성 등을 통해서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조사를 통하여 고창지역의 문화적 성격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마한분묘로는 주구묘와 대형 분구묘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자는 성남리, 만동, 예지리, 광대리, 남산리 등에서 발견되었고, 후자는 부곡리, 군유리, 용수리, 덕림리, 석남리, 장산리, 죽림리, 그리고 현재 발굴조사가 진행 중인 봉덕리 등 21기가 조사된 바 있다.
주구묘의 배치나 그 내용을 살펴보면 마한 사회가 혈연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는 내용을 충실히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점차 대형 분구묘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주구묘의 입지는 낮은 구릉의 사면에 자리잡고 있고 군집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으로 보인다. 매장주체부는 대상부의 중앙에 토광을 안치하고 있지만 대상부의 치우친 부분이나 주구에 옹관이 안치되어 있다. 또한 고창지역의 주구묘는 평면형태가 장타원형에 가깝고 한 곳에 개방부를 두는 공통점이 발견되고 있다.
주구묘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매장부로 사용된 대형 옹을 비롯하여 이중구연호, 단경호가 주를 이루고 옥이나 철기류가 보이고 있다.
대형 분구묘의 입지는 주로 구릉 정상부에서 말단부에 걸친 능선상에 두고 있지만 이외에 산사면과 평야에 있는 것도 있어 다양성이 보인다. 구릉정상부의 경우는 대체로 해발 50~70m 정도이며 주변에는 곡간평야가 펼쳐져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 주변을 조망하기에 용이한 곳에 해당된다. 또한 멀리서도 대형의 분구묘가 구릉정상에 우뚝 서 있는 모습을 보이게 하여 대형분구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는 입지인 것이다. 이러한 입지를 택하고 있는 유적은 봉덕리, 석남리, 장산리 분구묘를 들 수 있다. 한편 군유리 분구묘는 평지에 그 입지를 두고 있는데 주변에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어 역시 가시적으로 대형분구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어 분구 축조의 의도가 잘 반영되고 있는 예라 하겠다.
이 밖에 구릉의 말단부에 조성된 예는 부곡리, 용수리, 덕림리, 신촌리 등 주로 단독분인 경우가 많아 앞서 살펴본 것들과 대비되지만, 역시 이들 고분 앞에도 넓은 들판이 형성되어 있어 분구 축조의도에서는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
분구의 형태는 원형, 절두방대형, 전방후원형 등 3가지 유형으로 구분되는데 절두방대형이나 전방후원형의 분구묘가 원형에 비해 규모가 크다. 이러한 차이가 출자계통의 차이인지 아니면 시기차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과제라 하겠다.
이들 대형 분구묘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되지 않아 그 성격에 대해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지표조사를 통해 어느 정도 예견해 볼 수는 있겠다. 절두방대형인 봉덕리 3호분은 분구정상과 주변에서 대형 옹관편이 수습되었고 훼손된 분구내에서 석실분의 축조재료인 석재들이 노출되고 있어 옹관과 석실분이 함께 안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뿐만 아니라 단애면에서 주구 바닥면으로 추정되는 흑갈색점토층이 띠를 이루고 노출되고 있어 분구를 둘러싼 주구시설도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또한 주변에서 수습된 유물 가운데 유공광구소호편이나 기대편, 고배편 등도 옹관과 석실분을 매장주체부로 하고 있다는 추정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고창지역의 절두방대형 분구묘는 거의 동일할 것으로 보이는데 나주 반남면 일대의 복암리 3호분과 비교될 수 있는 자료로 보인다.
원형 분구묘에서는 분구 정상부에 노출된 석재들이 대체로 횡혈식석실분의 축조재로로 판단되고 있고, 분구와 석실의 규모를 비교해 보면 다장의 가능성보다 단장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분구 중앙에 석실분 1기를 안치한 것으로 추정될 수 있다. 이러한 예는 덕림리와 석남리 4호분에서 확인되고 있는데 전자의 경우 개석으로 추정되는 대형 판상석이 노출되고 있고, 후자는 벽석들이 안정된 상태로 노출된 상태였다.
이상과 같이 절두방대형과 원형 분구묘는 분형이나 규모 그 자체도 차이를 보이지만 매장주체부에서도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영산강유역의 연구성과를 참고하면 절두방대형에서 원형 분구묘로 이행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 시기는 대체로 5세기 전반에서 중반에 걸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칠암리에서 발견된 전방후원형 분구묘는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것 가운데 가장 북쪽에 해당하는 것으로 분포 위치 그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매장주체부는 석실로 후원부에 분구의 장축과 다른 방향으로 안치되어 있는데 광주 월계동의 예와 비교될 수 있다. 이러한 전방후원형의 분구묘는 고창지역의 절두방대형, 원형분구묘와 관련성뿐만 아니라 고대 한․일간의 문화교류에 대해서도 그 성격을 규명해야 새로운 과제를 갖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고창지역에서 백제시대 고분은 앞서 마한 분구묘에 비해 간헐적이면서 군집보다는 단독분 형태로 발견되고 있다. 현재까지 자료는 상갑리, 죽림리, 예지리, 율계리 등에서 석실분이 확인되고 있고, 고분에서 출토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토기류가 대동리, 석교리, 장곡리 등에서 직구호, 삼족기, 병형토기 등이 수습되었다.
석실분 유형을 보면 상갑리와 죽림리의 것은 웅진 3식으로 6세기말이나 7세기에 해당하며, 예지리의 석실은 전형적인 사비 2식으로 7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흥덕농공단지내 오호리 신지매 유적에서는 6기의 석실분이 확인되었는데, 그 중 3호분은 웅진 2식의 석실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금제이식과 더불어 ‘○義將軍之印’銘의 청동 인장이 출토됨으로서 고분 피장자의 신분을 짐작케 해 주고 있다. 4호분에서 출토된 직구호, 병형토기, 개배 등과 더불어 고분의 구조와 비교해 보면 6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이 백제의 중앙묘제인 횡혈식석실분의 축조는 백제의 중앙세력이 이 지역에 진출하는 시기를 가늠하는 하나의 척도로서 그 시기는 6세기초로 비정된다.
백제시대의 집자리나 분묘 외에 아산댐수몰지구에서 발견된 운곡리 백제토기 가마는 길이가 6m 정도인데, 평면은 아래쪽이 넓고 위쪽이 점차 좁아지는 타원형 사다리꼴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토기들은 전형적인 백제토기들로 삼족기, 뚜껑, 광구호, 직구호 등이다.
Ⅲ. 맺음말
앞에서 간략하게 고창지역의 마한 백제문화에 대해서 고고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소개하였다. 그 내용과 의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고창지역은 어느 지역보다 마한문화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음을 집자리와 분묘유적자료를 통해 확인하였다. 곧 마한『牟盧卑離國』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자료들인 것이다.
둘째, 이와같이 강한 마한문화 전통은 죽림리, 상금리를 비롯한 고인돌 축조집단 이후 형성된 고창지역의 문화적 특성으로서 고인돌 문화의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셋째, 대형 분구묘의 축조시기에서 보듯이 백제의 영역에 편입된 이후에도 고창지역에서는 마한문화 전통의 분묘를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축조하고 있었는데, 백제 중앙과의 관계에서 정치적인 자율성이 상당부분 확보되고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넷째. 전방후원형 분구묘는 일본에서 유행한 묘제로서 고대 한일문화교류의 관계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지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다섯째, 오호리 횡혈식석실분의 축조는 백제중앙세력의 지방 진출을 의미하며, 마한문화 전통에서 백제문화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현재 조사가 진행 중인 봉덕리 분구묘에서 보면 ‘고창만의 문화적 특성’이 발견될 가능성이 크게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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