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시대 도작문화의 중심 동림저수지 | ||
눌제 둑은 내 고향 줄포와 연결되는 중요한 둑이다. 줄포! 그 이름만 들어도 흥분된다. 그런데 난 왜 그렇게 줄포에 관심을 안가지고 있지! 줄포여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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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줄포면의 지적계장으로 계셨던 아버지에게 말로만 들었던 저수지가 있다. 아버지는 동림저수지의 농수로를 기획하셨고,
당시 동림저수지를 수도 없이 돌아다니셨다 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자주 동림저수지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어릴 때 동네 형들을 따라 동림저수지를 가본 적이 있다. 처음 본 동림저수지는 너무 넓어 꼭 바다와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하긴 성인이 된 지금 봐도 넓은 호수이다.
이 일대의 역사를 안 뒤부터 늘 가슴 속 깊은 곳에는 눌제를 건너 백제인들을 무수히 죽인 나당군에 대한 불편한 심기가 일어나곤 한다. 한국과 일본이 상생에서 갈등의 문을 연 사건이 바로 백제부흥전쟁 최후의 격전인 백강전쟁이다. 이 백강전쟁이 바로 부안 주류성(우금산성)과 중방 일대에서 벌어졌다. 백제부흥군은 4년간 백제의 아우인 왜의 지원을 받으며 줄기차게 조국부흥전쟁을 수행하였다. 이 백제부흥전쟁을 지탱해준 곳이 비옥한 농경지가 있었던 고창이었고, 그 중심이 동림저수지 일대였을 것이다. 백제는 5방 39군 103현이 있었는데, 나당군에 의해 공주와 부여 일대의 백제 고토는 초토화 되었지만 전라도 남부지역은 건제하였다. 특히 흥덕을 중심으로 한 상칠현은 백제의 중방인 고사부리의 속현으로 경제적으로 윤택한 지역이었다.
한편 눌제는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물을 담아두는 저수지의 개념은 아니었을 것이다. 바닷물은 동진강을 따라 고창군까지 밀고 올라왔기 때문에, 이 지역은 늘 염해를 입었다. 눌제는 고부천 주변의 농경지를 염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제방을 쌓았다. 눌제 배후의 비옥한 농경지인 고창의 흥덕과 성내지역을 보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입증하는 것이 일제강점기에 눌제와 고부천 하류 팔왕에 갑문을 설치한 것이다. 이 지역에 튼튼한 갑문을 설치함으로써 동진강 하류를 거쳐 유입하는 밀물을 차단하여 토지이용을 보다 안정되게 가져갈 수 있었던 것이다.
흥덕제의 이름은 조선총독이 명명한 것이라 한다. 동림저수지는 관개면적 1674㏊에 유당 면적 4420㏊, 저수량 995만㎥으로 도내 최대의 농업용 저수지이다. 저수지 축조는 고창군 흥덕·성내, 정읍군 고부·영원, 부안군 건선(줄포)·주산·동진·백산·부령(부안) 등지를 몽리구역에 둔 고부수리조합(古阜水利組合)이 하였다. 고부수리조합은 고부평야의 홍수와 가뭄을 대비해 1916년에 설립되었으며, 논경지 3,600여 정보에 필요한 관개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고창군의 흥덕면과 성내면에 걸치는 흥덕제(興德堤)를 축조하였다. 고부수리조합이 고부천 상류에 축조한 흥덕제는 하천 양안에 형성된 충적지와 하구의 간척농지에 관개수를 제공하고 있다. 고부천이 동진강과 합류하는 지점일대의 간척지도 흥덕제에 의해 관개용수를 공급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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