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신굴은 주류성의 우금암에 있는 거대한 석굴이다.
이곳은 일명 복신굴로 부흥백제국의 군을 지휘하고 통제한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福信の洞窟は、周留城の遇金岩がある大きな岩窟だ。
ここは百済軍を指揮統制した福信の洞窟として知られている。
초기 풍왕 정부의 중심에는 도침과 복신 장군이 있었다.
두 장군은 웅진강구와 두량윤성 전투 이후 갈등이 발생하여
복신이 도침을 제거 후 복신이 군사적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다.
이 과정에서 전열이 분산되어 662년 7월 지라성전투에서 패전하였다.
풍왕은 장기간 일본체류로 국내 정치기반이 약하여 정권을 실질적으로 통제하지 못하였고,
성에서 주류성으로 환도한 후에는 국가제사 주례의식의 주관을 할뿐이었다.
복신이 권력을 독점하자, 풍왕과 복신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28(의자왕)의 기사에 “ 이때 복신이 이미 권세를 오르지 하면서 부여풍과 점차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였다. 복신은 병을 핑계로 굴속 방에 누워 풍왕이 문병 오는 것을 기다려 잡아 죽이려 하였다. 풍왕이 이를 알고 친하고 믿을만한 자들을 거느리고 복신을 엄습하여 죽이고는 사신을 고구려와 왜에 보내 군사를 청하여 당나라 군사를 막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서기 천지 2년 6월에 ‘백제왕 풍장은 복신이 모반하는 생각이 있음을 의심하고, 가죽으로 손바닥을 뚫어 묶었다. 그러나 혼자 결정하기 어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제신에게 물어, ”복신의 죄는 이미 이렇다. 참할 것인가, 아니가“라고 말하였다. 그때 달솔 德執得이, ”반역의 사람을 방면해 버릴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복신은 집득에게 침을 뱉고, ”썩은 개, 미친 놈“이라고 말하였다. 왕은 역사를 준비하고, 참하여 머리를 젓을 담갔다’라는 기록이다. 복신의 죽음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바로 복신이 병을 핑계로 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주류성이라 주장하는 건지산성이나 학성 등에 복신굴이 있는가? 복신굴이 바로 주류성의 결정적 근거가 되는 것으로 굴이 없다면 주류성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舊唐書 龍朔 2년 (662년)의 내용에는 “...... 이 때 복신은 이미 권력을 독차지하여 부여 풍과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게 되었다. 복신은 병이 들었다는 구실로 굴속에 누어서 풍이 문병하러 오기를 기다려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풍이 이를 알고 심복들을 거느리고 복신을 급습하여 죽이고 고구려와 왜국에 사람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여 당 나라 군사를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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