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庾信과 보령원(保寧院) 사패지(賜牌地)
김유신과 백제라는 관계는 악연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백제의 옛 땅 전라도 부안에 김유신을 모시는 사당과 사패지가 있다는 것은 언뜻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에는 신라장군 김유신을 모시는 사당과 사패지를 내렸다는 전첩지가 있다. 보령이라는 말이 의미라는 곳은 보호하고 평안하게 했다는 뜻이니 김유신장군이 이곳에서 무엇을 했기에 그러한 의미의 사원을 만들고 땅까지 주었는지 이곳의 백제의 후예들은 알 수가 없다.
수많은 백제인들을 죽인 원수의 자리에 김유신장군의 보령원과 사패지는 어울리지 않은 최후의 승자 전적지라면 이해는 갈 것이다.
중국과 일본의 書記가 나오기 전 676년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우금암의 원효방을 찾아와 상량(上樑)을 하였다. 그 상량의 기록에 백제부흥군들이 주류성과 백강의 싸움한 기록이 고려시대 ‘원감국사’와 조선시대 ‘개호선사’에 전승되어 1667년 개암사 주지 밀영대사(蜜英大師)가 기록하였다.
그 개암사사적지별기가 1979년에 발견이 되었다. 그 기록으로 말마암아 주류성과 백강의 확실한 위치를 고증하게 된 것이다. 또한 조선 성종이 이곳 보령원 주변의 토지를 사패지의 기록을 통해서도 백강과 주류성의 위치는 확실해지는 것이다.
성종대왕 사패지 기록을 보면, “성종대왕이 전교를 내려, 興武王 金庾信은 잘 있느냐” 안부를 묻고 “우리 조선은 무사히 높은 베게를 베고 한가롭게 누워있는 것은 흥무왕의 덕이라 그 공이 어떠하랴, 사패지(賜牌地) 경계는 전쟁을 성공한 곳에 땅을 그어 그 자손에게 주니, 동쪽으로는 구산(주산면 사산리)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학치(鶴峙 개암사 월정약수 위로 올라가는 길)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留陳峙(호벌치)에 이르고, 북으로는 장전평(상서면 장전리)에 이른다”고 김해김씨 보령원의 전첩지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 성종이 사패지를 내린 것을 보아도 부흥백제국의 왕성이 바로 현재의 우금산성이 주류성임을 확실하게 알 수 있게 해준다. 보령원과 성종대왕의 사패지의 기록만을 통해서도 백강과 주류성에 대한 위치 논쟁이 얼마나 지역주의에 빠진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행동인지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왜곡이며, 민족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일이다.
成宗大王 賜牌地 記錄
成宗大王傳敎 曰 興武王金庾信子孫好在否 我朝無事高枕閒臥
皆是興武王之德也 其功何如哉 賜牌境界戰捷成功之處劃地以給子孫
而東至龜山西至鶴膝峙南至留陣峙北至長田坪
김유신 장군이 백제부흥군을 정벌한 기록을 한 비석이 있다고 한다. (백비는 상서 문장리의 김이정씨가 소유, 보령원지 참조-줄포 김장순씨 소장). 안중근선생의 동생인 안중식 선생이 그린 김유신 장군 영정은 도둑맞아 없어져 최근에 새로 300만원을 주고 그린 것이라 한다. 안중식 선생이 그린 그림은 장군복을 입은 김유신장군이었는데, 현재는 관복을 입고 있는 그림이다.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김유신장군이 산에 올라 백제왕을 화살로 쏴 죽였다고 한다. 그러나 백제왕인 풍왕은 백강구에서 제왜연합군이 당수군에 패배하자 바로 고구려로 망명을 하였다. 위의 전설은 신빙성은 없으나, 이 지역이 백강구전쟁의 지역임을 알 수 있는 근거라 할 수 있다. 부흥백제군이 장패평에서 663년 9월 7일 항복을 하고 백제군이 모두 섬멸되자 그 공으로 문무왕이 우금산성에서 보이는 바다가지의 땅을 모두 김유신장군에게 주었다고 한다.(김용건씨) 후에 조선 성종도 김해김씨에 주류성 앞의 토지를 사패지로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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