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군의 사비성 탈환 공격과 방어전
백제는 사비성과 웅진성에서 나와 항복하였으나, 이 두 성을 제외한 다른 큰 성들은 아직도 백제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백제군은 흑치상지, 복신, 도침과 같은 인물들을 중심으로 구심력을 되찾아 나당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660년 8월 26일 복신과 도침 및 흑치상지는 임존성에서 소정방이 이끄는 나당연합군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여 당군을 물리쳤다. 이 전투에서 실패한 소정방은 동년 9월 3일 의자왕 및 왕족과 신료 93명 그리고 백성 1만 2천명을 대동하고 회군하였다.
그 후 백제군은 660년 9월 23일부터 11월 5일까지 사비성을 되찾기 위하여 치열한 전투를 지속하였다. 그리고 661년 2월에서 4월까지 웅진강구 전투와 두량윤성 전투에서 백제군은 신라군을 격퇴하였다. 이즈음 200여성이 백제군에 호응하였는데, 의자왕대의 지방 통치는 5部 37郡 200城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므로, 이 당시 200여성이라면 사비와 웅진 지역을 제외한 백제의 거의 전 지역이다.
사비성을 점령한 나당군은 당군 1만 명과 신라군 7천 명을 웅진성에 남기고, 소정방은 당으로 철수를 하였는데, 당으로 철군한 소정방은 그 후 백제와 동맹한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662년 2월에 회군하였다. 그 후 당군은 백제군의 공격을 받아 보급품 조달도 어려운 상항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당은 웅진 주둔군에게 회군해도 좋다는 결정을 내리게 되며, 군사들도 귀환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당장 유인궤는 귀환을 강력하게 반대하게 되고, 당군은 그대로 웅진성에 머물게 된다.
661년(무열왕 8년) 3월 5일에는 신라군 품일이 군사를 둘로 나누어 두량윤성 남쪽의 진터에서 백제군의 공격으로 흩어졌다. 12일에는 신라의 대군이 두량윤성과 고사비성을 공격하였는데, 고사비성 밖에 와서 진을 치고 전투를 하던 신라군은 두량윤성에서 한 달 엿 세가 되도록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4월 19일 신라군이 후퇴하고 있을 때, 빈골양에서 백제군과 싸워 크게 패하여 퇴각하였다. 결국 신라의 두량윤성 공격은 실패했고, 그 패전은 신라에 충격적이었다. 신라는 이 전쟁으로 다시 출전하지 못했으며, 신라왕은 패전한 장군들을 차등을 두어 책벌하였다. 그리고 연이은 전쟁에서 패배한 품일은 대당장군직을 삭탈 당했으며, 그 후임에 김인문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신라 무열왕은 신라군이 두량윤성에서 패전하여 퇴각한 2개월 후인 661년 6월에 화병으로 사망한다.
당나라의 무식한 장수 소정방이는 남의 나라 보물에 낙서를 하여 자신이 만든 것처럼 만들었으니 얼마나 우스운 놈인가?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 지가 만든 것도 아니 것만 지놈이 만든 것인냥 조각을 해 놓니......
정림사지 5층석탑! 그렇게 많이 보아도 늘 아름답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인지. 지대석부터 탑신까지 그 하나 크기나 모양이 같은 것이 없이 정교하게 배열하여 쌓아 만든 정림사지5층석탑이야 말로 쥬신족 역사의 위대한 걸작이라 할수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들 후손이 일본으로 건너가 지금은 제작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거대한 불당을 건축하지 않았던가?
부여 임천의 성흥산성 백제의 수도 부여가 함락되자 흑치상지, 복신, 도침을 중심으로 항전을 시작한 곳 중의 하나가 바로 임존성과 주류성이다. 위의 사진은 성흥산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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