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강전쟁(白村江の戦い)

나당군의 백제침공과 도성 점령

백강 문정사랑 2009. 9. 2. 17:30

나당군의 백제침공과 도성 점령


한반도에서 고대국가가 병합되어 가는 과정은 562년 가야의 멸망으로 4국시대가 끝나고, 이어서 신라가 당시 세계 강대국이었던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하면서부터 3국시대가 마무리되는 단계로 접어든다. 성왕대에 백제는 남진하는 고구려 세력에 대항하고 고토회복을 위하여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하류는 백제가, 상류지역은 신라가 점유하게 된다. 그러나 곧 신라는 백제 동맹국을 배신하고 한강하류지역도 급습하여 점령한다. 이에 성왕은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옥천전투에서 이동 중 전사하게 된다. 성왕 이 후 백제는 다시 대대적으로 신라를 공격하게 되는데 그 주역이 바로 의자왕이다. 의자왕은 642년(재위 2년)에 신라 서쪽 지역의 40여성을 점령하고, 대야성을 점령하여 옛 가야국 영토인 낙동강변까지 진출하기에 이른다. 신라는 이러한 국가위기 상황을 타계하기 위하여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신라는 당시 세계 신흥강국인 당에 백제공격을 요청하였고, 660년 당은 13만을 출병시켰다. 신라는 태자 법민과 김유신이 이끄는 5만의 병력으로 백제를 공격하였다. 660년 가을 신라군이 황산벌로 진군하자, 백제는 계백이 이끄는 5천의 군사로 황산벌에서 신라군을 맞아 절대적 군사력 열세로 패배하게 된다. 황산벌과 기벌포에서 승전한 나당군은 사비성을 포위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의자왕은 7월 13일 웅진성으로 이동하였으나, 5일 후인 7월 18일 자진 항복하였다.

 

해상대제국 백제, 만주를 호령하던 대부여족들의 후손 백제의 허망한 멸망과 한이 서린 곳 백마강. 나당군의 점령으로 짓밟힌 백제역사의 왜곡의 한장면이 바로 삼천궁녀가 죽었다는 바로 이 낙화암이다. 신라의 배신은 백제의 중흥을 꿈구던 성왕를 죽음으로 몰고 백제는 하염없이 반도를 버리고 열도의 나라 일본으로 건너가 새로운 부활을 꿈꾼다.

 

 

백제는 일찍이 세계사에서 최고의 도시를 계획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사비도성마스터플랜이었다. 왕성인 사비성을 쌓고 그 아래로 도성을 계획하여 웅장한 수도의 면모를 갖추었다.

전쟁의 패배로 폐허가 되어버린 부여, 만주의 부여가 아직도 생생히 살아 숨쉬는 땅, 그래서 백제를 부흥하기 위해 성왕은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를 하고 나라이름을 남부여라 하지 않았던가?

음양오행의 사상과 풍수지리의 결정판이 바로 부여도성계획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나 피신하기에 다급했던지 백제인들은 국가의 보물중의 보물이라 할 수 있는 금동대향로를 나당군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백제 나성 바로 옆 능산리 무덤들 사이 절터 서쪽의 한 구덩이에서 버려 1300여년의 세월을 진흙의 뻘에서 지내야 하는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