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성으로 왕성 천도와 풍왕의 왕권계승
부흥백제국의 주류성 천도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나당군을 방어하기 위하여 주류성을 왕성으로 정하였다.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에 있는 우금산성은 거의 4km에 달하는 포곡식 산성이다. 울금바위에서는 부안의 해안은 물론 멀리 고부까지 보이는 천혜의 요새이다. 정확한 근거가 있는데도 주류성을 아직도 확정지지 못하는 사학계는 분명 반성을 해야 한다.)
백제의 좌평 복신은 좌평 귀지를 당의 포로 100여명과 함께 왜에 보내 군사지원요청을 하였으며, 아울러 풍장의 귀국을 요청하였다. 이에 왜는 풍장에게 왜의 전함 170척 5,000여명의 호위병을 이끌고 백제에 가도록 지원하였고, 661년 풍장이 귀국하자 복신은 마중 나와 절하고, 국정 일체를 위임하였다.
(부안군 주산면 백석리로 복신장군이 풍왕를 맞이 하였던 곳으로 과거 두포천를 따라 갯골이 발달하여 내륙 깊숙히 까지 배로 왕래하였다.)
662년 12월 백제왕 풍왕과 신하 좌평 복신 등은 왜국 장군 挾井連, 朴市田來津과 의논하여, 방어전에는 유리하나, 토지가 척박하고 농잠 할 땅이 부족한 주류성에서, 삼한에서 기름진 곳으로 이름난 避城(김제)으로 왕성을 옮겨야 한다는 결정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朴市田來津만이 홀로 피성은 적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간언하였다. 여기서 풍왕과 복신 등이 왜의 장군들과 함께 왕성재천도문제를 토론하였다. 여기서 풍왕과 복신 등은 장기전을 의식한 식량조달문제를, 왜장은 전시의 방어문제를 중요시 하였다.
(김제의 향토사학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정확한 문헌이 나와있고 사료가 있는데, 김제 성산이 피성이었음을 누구나 인정을 하는데, 왜 이곳이 백제32대 풍왕대의 수도이고 백제의 전략적 요충지임을 밝히지 못하는가?)
그러나 663년 2월 2일 신라가 백제의 남부지역 居列(거창), 居忽(남원), 沙平(순천), 德安(은진) 등을 점령하게 되자, 피성이 적에게 너무 가까이 위치하게 되어, 왕성은 다시 주류성으로 옮겨진다. 따라서 백제의 왕성은 한성을 시작으로 웅진성, 사비성, 주류성으로 옮겨지며, 주류성에서 잠시 피성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주류성으로 옮겨진다.
왜에 있던 백제왕자 부여풍을 백제왕으로 추대하였으며, 백강구전쟁에서 패배한 후 고구려로 망명하였다. 의자왕의 아들 풍장은 631년(舒明 3년) 3월 1일에 왜로 갔으며, 그는 왜국 나라분지에 소재 한 三輪山에 있었으며, 도일 30년 후인 661년에 다시 백제로 귀국하는데, 이는 복신의 요청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백강전쟁(白村江の戦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왜연합군의 패전원인 (0) | 2009.09.02 |
---|---|
백강구전쟁의 패배와 부흥백제국의 몰락 (0) | 2009.09.02 |
백제군의 사비성 탈환 공격과 방어전 (0) | 2009.09.02 |
나당군의 백제침공과 도성 점령 (0) | 2009.09.02 |
부안지방의 지명을 통해 본 백강위치 비정 (0) | 2009.09.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