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강은 어딜까?
백강이 지금의 어느 곳인가에 대한 지리 비정의 문제는 많은 논의를 거처 이제는 대체로 동진강으로 인정을 하고 있다. 津田左右吉을 비롯한 일본학자들은 일찍부터 백강이라는 전적지를 찾기 위해 사서에 나오는 지명을 오로지 음성학적으로 비교하였다. 백강구의 위치문제 논쟁은 80여 년 간 계속되어 왔었다.
변인석은 현재 한국의 백강구 비정의 학설은 6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금강설로 일본의 정설로 되어 있다. 둘째, 군산포설로 가구슈우 가메고로와 아유가이 호노신 등이 주장하고 있다. 셋째, 동진강설은 小田省吾와 전영래, 안재홍, 이도학, 서정석, 노도양, 노중국. 넷째, 줄포만설로 今西龍 등이 주장하고 있다. 다섯째, 남양만설로 吉田東伍와 홍성의 향토사학자 朴性興 등이다. 여섯째, 연기설로 金在鵬과 신채호 등이 있다.
(김유신장군을 모신 사당이 왜 우금산성 바로 앞에 있을까? 김유신이 이곳 전라도까지 무엇하러 왔는가? 보령원의 역사를 기록한 보령원지에는 조선 성종시대에 이곳을 사패지로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김유신 장군이 백제를 완전히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반도의 남쪽을 점령한 것에 대한 공로를 인정해 주었던 것이다. 그것도 가장 치열한 전쟁터였던 곳을 그것도 사대주의가 가장 왕성했던 조선시대에.....)
백강의 위치는 주류성의 그것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그 위치에 관해서는 위의 여러 학설이 있지만 이에 관해서는 백강을 금강의 하구로 비정하기 어려운 이유를 소개하고자한다.
첫째, 금강근처에 부흥운동을 지탱할 수 있는 산성은 있지만, 주류성으로 비정하는 건지산성은 3년간이나 부흥운동의 거점이 될 만큼 견고하지도 못하고 천험의 요새지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1998년에 실시한 고고학적 조사 결과 건지산성은 고려시대 축조한 것으로 밝혀져 백제말기의 주류성과는 무관한 것으로 판명이 되었다.
둘째, 660년 7월 소정방이 이끈 당나라 군대가 사비도성으로 진입하였던 길목에 부흥군의 본영을 설치한다는 것은 실패한 전철을 다시 밝겠다는 것이 되므로 수긍하기 어렵다.
셋째, 663년 백강전투에 참전하는 왜군이 현해탄을 건너오는 고된 항해라는 점을 생각할 때 될 수 있는 대로 상륙지점을 남쪽으로 잡는 것이 용이하므로, 금강 이남의 해안요소가 적당하다.
향토사학자 박성흥이 홍성읍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학산성을 주류성으로 비정하였다. 그 근거로 학의 훈이 두루미이므로 학산은 두루뫼이고 축약하면 ‘두륨’이 된다. 두루미는 일본어로 쓰루이고, 두륨의 일본발음은 쓰루무〉쓰름〉쓰누이다. 이 쓰누의 한자표기가 州柔의 근거라는 것이다.
그런데 ‘쓰루성’이라고 전해지던 성이 일본어로 번역되어 학성으로 표기된 것도 아니고, 학성이라는 성 이름은 구전인 만큼, 쓰루와 학성을 그것도 일본어를 매개로 하여 연결 짓기는 어렵다. 최근 산성 내에서 출토된 명문 와당을 통하여 백제의 사시량현(沙尸良縣)의 縣城으로 밝혀지는 조사 성과가 있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문무왕 원년 9월조의 기사가 시사한 바로는 이곳이 이미 신라군의 점령 하에 있었다는 점이다.
연기는 음운학상 같다는 지적이나 논의할 가치조차 없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견해이다.
位金岩山城은 지세가 험준한 요새이므로, 주류성의 지형조건과 부합되고 있다. 여기에 하룻밤 사이에 이를 수 있는 거리에 소재하였다는 피성을 김제 벽골제로 비정하는 대체의 지견과 무리 없이 부합된다. 게다가 663년 6월, 백제 풍장왕은 복신장군을 의심하여 살해하게 된다. 이때 복신장군은 굴실에 숨어 있었다. 이러한 굴실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위금암산성에만 있는 결정적인 고증자료이다.
(복신이 풍왕에게 잡혀 죽었던 곳으로 이곳에서는 복신굴이라 부르고 있다. 복신의 죽음은 곧 나당군에게 알려졌고, 명장을 잃은 제왜연합군은 3년간의 줄기찬 대나당전쟁의 종언을 고해야 했다. 결국 백제는 내부의 분열로 스스로 무너진 것이다. 이를 본 명장 흑치상지는 조국 백제의 부흥을 누구에게 기댈 것인가 하는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당군에 투항을 하고 그는 지수신이 40여일 나당군에 버티던 마지막 부흥세력의 기지인 임존성을 무너뜨리며 백제의 매국노로 남게 된 것이다.)
만약 부흥군의 총본영이었던 주류성을 扶安의 위금암산성으로 비정한다면, 그와 근거리에 소재 한 고부를 ‘平倭縣’이라고 불렀던 역사적 사실과도 상응한다. 왜냐하면 이 지명은 문자 그대로 왜군을 크게 평정한 전승을 기념하여 생겼다고 볼 수 있으므로 백강전투와 관련지어 연원을 생각한다면, 주류성은 ‘평왜현’ 인근 지역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주류학계에서 조차도 주류성은 부안의 위금암산성으로, 백강은 동진강으로 비정하고 있다. 당시 동진강은 크게 현재의 동진강과 고부천 및 주류성 앞의 두포천은 하나의 큰 하구로 계화도 내해에서 합수가 된다. 따라서 백강은 지금의 단순하게 현재의 동진강이라는 것보다는 고부천과 두포천을 포함한 계화도 내해(현재는 개간이 되어 논으로 활용되고 있는 개화간척지 일대로 추정됨)를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두포천은 현재 거의 개간이 이루어져 논과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곳은 80년대 이전 경지정리가 이루어지기까지 갯들이라 불리는 갯흙들이 나왔다고 한다. 1910년대의 조선수산지에도 계화도를 중심으로 고부천과 두포천에 넓은 갯벌을 볼 수 있다. 두포천은 썰물 때는 물이 차 있지만 밀물 때는 갯골을 통해서만이 배가 왕래가 가능하다. 두포천의 포구는 이 갯골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많은 배가 한꺼번에 정박할 수 있는 큰 포구의 발달은 미약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당시 주류성을 배로 왕래할 수 있는 가장 지근거리의 포구가 바로 목포와 고잔마을이다. 따라서 이곳과 백석리가 바로 주류성의 검문소와 같은 역할을 한 마지막 방책지인 水城으로 추정된다. 이 수성 내부로 직접 들어 올 수 없었던 당수군은 먼저 부안진성과 그 부근의 하안(고부천과 동진강)에 진을 치고 있다가 계화도 내해로 들어오는 왜 수군과 격전을 버렸던 것이다.
(당 주력군이 먼저 점령한 부안진성으로 현재는 부안읍민의 휴식처로 사용되고 있으나 그 어디에도 위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표지나 안내판은 보이지 않는다.)
해전에서 중요한 승리요인은 기상, 해류, 해안지형 조건, 군사정보, 우수한 무기, 잘 훈련된 군사와 전략 전술 등을 들 수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당 수군은 이미 당수군은 지형과 조류 등을 확인하고, 백강에 와서 진을 굳게 치고 왜 수군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왜 수군은 진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당 수군을 선제공격하였으나, 기상을 보지 않고 공격하여 눈 깜짝 할 사이에 좌우에서 공격하는 당 수군의 협격을 받아 패배하였고, 특히, 풍향과 조수를 살피지 않아 뱃머리와 고물을 돌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익사자를 내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지역은 밀물과 썰물의 조수의 큰 서해안에 입지해 있으며, 또한 그 영향을 쉽게 받는 내해에 위치할 수밖에 있다. 따라서 썰물시 왜군은 물을 따라 뱃머리를 돌리기도 전에 당 수군의 화공으로 전멸을 당하게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현지 답사결과 부안 상서와 행안 및 계화 들은 과거 모두 넓은 간석지의 바다였으며, 1910년 전라북도 해안을 표시한 조선수산지에서도 그 모습을 확연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왜 수군과 당 수군 및 신라군의 동태를 보면, 8월 13일 풍왕이 왜군을 백촌에서 맞이하였고, 동월 17일 나당군은 주류성을 포위하며 공격을 한다. 손인사가 이끄는 당군은 7월 17일 부안진성(부안읍)에서 진을 치고 상황을 보고 있었다. 손인사가 이끄는 당군은 부안진성에 진을 치고, 두포천의 하류에 있는 구지리산성, 염창리산성, 수문리산성, 용화동산성, 반곡리산성 들의 여러 토성들을 점령했으며, 중방인 고사비성으로 통하는 뱃길인 고부천과 동진강이 합수하는 전략적 요충지인 백산산성을 점령하여 제왜연합군과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해안방책지들이 당군에 점령당한 제왜연합군의 수장인 풍왕은 663년 8월 13일 두포천의 상류인 백석에서 왜 수군을 맞이하였다.
현재 부안의 향토사학자들은 백촌을 주산면 백석리로, 백사는 백석리 위의 도성과 돈계로 비정하고 있다. 왜 전함들은 백촌을 중심으로 해서 주류성 부근의 고잔리의 목포지역에 정박을 했었을 것이다. 왜군은 지금의 상서면사무소와 우덕초등학교 일대의 저기(猪基)마을에 진을 치고 있었다고 전한다. 저기마을은 돼지터라고 부르지만 원래는 大陣터라는 지명이 변하여 된 것이라 전한다.
한국 서해안 간석지의 넓은 습지는 조수차가 심해 겉으로는 바닷물이 가득 찰 때는 수심이 깊어 보이지만, 실제 배가 다닐 수 있는 곳은 갯골로 한정된다. 따라서 왜 수군 일부는 두포천 상류의 백석과 목포 등에 정박해 있고, 다른 함대는 상서와 하서 일대의 해안의 갯골을 따라 정박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당 수군은 어디에 진을 치고 있었을까? 당 수군은 7월 17일부터 부안진성(상소산)에서 진을 치고 지형과 조류를 조사하고 전략을 짜고 있었을 것이다. 8월 13일에 도착한 왜 수군이 두포천에 정박을 하고 있었다면 두포천은 백촌강의 직접적인 전장터가 될 수 없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면 왜 수군은 밀물을 타고 백촌강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급속히 빠지는 썰물을 모르고 있다가 배를 돌릴 겨를도 없이 배들이 펄 속에 쳐 박혀 움직일 수 없었다는 기록 때문이다. 간석지의 넓은 습지는 물이 빠지면 개벌이 되기 때문에 배를 돌릴 여유가 없는 것이다. 결국은 바다 습지의 갯골을 중심으로 한 좁은 공간으로만 배의 통행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왜군들은 배에서 뛰어 내려 걸어 가려했지만 질퍽한 갯벌을 빠져 나가지 못하고 죽임을 당한 것이다. 살아남은 병사들이 주변의 방책지로 이동을 하였으나, 나당군의 공격으로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본인의 소견으로는 왜 수군이 정박한 곳은 현재의 주산면 백석리와 도계리, 그리고 상서면 고잔리의 목포 및 상서와 하서의 변산반도 산 아래의 주요한 포구들이 되었을 것이다. 두포천은 감조하천으로 조수차가 심해 포구의 발달이 미약할 것이다. 왜 함대 천척이 한꺼번에 두포천 지류에 정박을 하기에는 장소가 협소할 수밖에 없다. 또한 당군은 부안의 진성인 상소성에 진을 치고 있었고, 함선은 동진강 지류인 고부천의 하류 부근(부안군 백산면)에 진을 치고 왜 수군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좁은 갯골만을 의지해서 전 함대가 정박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성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두포천 상류의 백석부터 하류의 계화도 내해 서안으로 정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먼 바닷길을 넘어온 왜 수군은 현재의 상서면 가오리의 돼지터(대진터)에 진을 치고 있었을 것이다.
(왜군이 주둔했던 지역이라 구전되어 내려오고 있는 곳으로 현재는 우덕초, 상서면사무소, 우체국 등이 있는 저기마을이다.저기마을은 돼지터를 한자로 쓴 것으로 이는 대진터를 말하는 것이다.)
이미 두포천의 동안 일대의 해안방책지와 고부천 및 동진강은 당군에 의해 점령이 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왜 수군은 밀물을 타고 공격을 해오다 썰물 때를 못 맞추고 뱃머리를 못 돌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 전장터는 계화도 內海를 중심으로 이루어 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 일본인 학자가 한국에서 수년간 답사한 결과 주류성과 백강이 바로 부안지방이라는 내용을 소개한 책이다. 본 답사에는 개암죽염 창시자이신 효산스님의 설명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일본에서 구입이 가능하다. (http://www.7andy.jp/books/detail/-/accd/18729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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