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성 일대의 산지와 하천(최진성박사)
변산반도는 두포천과 고부천을 포함하여 백악기 화산암류의 산지가 발달해 있으며, 그 오른편으로는 동진강과 만경강 유역의 호남평야가 펼쳐져 있다. 변산반도의 산세는 서고동저의 지형으로, 서쪽의 변산반도 주봉들은 해발 300-400m의 산지들이 대부분이며, 그 동쪽의 주산면의 내륙 산지는 200m 이하의 낮은 봉우리들로 이루어 졌다. 반산반도의 주위의 낮은 산세는 우금산성을 우뚝 솟은 성채로 보이게 하는 시각적인 효과와 함께 조망권이 탁월한 요새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우금산성의 시야는 동쪽으로는 고부천 일대의 넓은 들과 멀리 노령산지를 바라볼 수 있으며, 남쪽으로는 줄포만의 낮은 산지들과 동림저수지를 볼 수 있으며, 북쪽으로는 부안진성인 성황산을 비롯한 동진강과 만경강으로 출입하는 배들을 볼 수 있다.
(말없이 유유히 흐르는 동진강의 물결. 이 물길의 밀물을 따라 올라가던 제왜연합군은 백산산성과 부안진성 부근에 동진강에 정박해 있는 당수군을 만난다. 당수군은 썰물때까지 기다렸다가 물이 빠지자 제왜연합군을 사정없이 몰아 결국 좁은 갯골이 펴져 있는 계화내해에서 몰살을 당하였던 것이다.)
(서서히 밀물이 들어 오는 줄포만의 바닷가. 들어 올때는 언제 들어 온지 몰를 정도로 빠르게 물이 들어 오고, 물이 나가는 썰물 때도 눈깜짝 할 사이에 물은 빠져 버리고 만다. 밀물 때는 아무리 바닷길에 능숙한 사람이라도 갯골이 어디있는지 헷갈리기 마련이다. 겨우 썰물이 되어서야 알 수 있는 것이 갯벌의 갯골이다. 빠르게 갯벌로 물이 들어오는 줄포만의 모습)
만경강과 동진강은 일제시대에 직강공사와 간척공사로 반듯해지기 전에는 조수간만의 영향을 크게 받아 그 하류의 양안은 범람원과 갯벌의 간석지가 발달하였다. 주류성 앞을 지나는 斗浦川은 서해로 직접 유입이 되며, 고부천은 동진강의 지류는 아니나 동진강과 같은 하구에 유입한다.
동진강과 만경강의 하구 일대의 최대조차는 7.6m, 평균조차는 약 6.2m이다. 그래서 두 하천의 하류는 자연 상태에서는 해발고도 3.1m에 3.8m까지 바닷물의 밀물이 거슬러 올라가는 感潮하천이다. 특히, 홍수와 밀물이 겹칠 때는 김제 두월천에서는 황산 용지, 원평천에서는 봉남 대주, 동진강에서는 신태인까지 밀물의 영향을 주었다. 이 마을들의 해발고도은 대부분 8-11m에 해당된다. 두포천과 고부천은 만경강과 동진강의 하구와 인접하고 있기 때문에 평균조차는 6.2m정도라 할 수 있다. 두포천은 상류의 해발고도가 4m 내외라서 사산저수지 아래까지 자연상태에서 바닷물이 거슬러 올라오는 감조하천이다.
고부천은 하류의 백산면까지 해발고도가 3-4m정도이며, 그 중류인 영원면과 고부면 일대는 6-8m이다. 따라서 고부천은 하류는 자연상태에서 감조하천이고, 홍수와 밀물이 겹치는 그 상류까지 바닷물이 거슬러 올라와 영향을 주었다.
두포천과 고부천은 경지정리가 이루어진 80년대 이전까지는 두 하천의 중상류까지 ‘갯들’이라고 불렸던 지점들이 많았고, 이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땅을 파보면 갯벌과 관련된 ‘개흙’이 나온다고 하였다.
(서해안고속도록 줄포IC로 이곳을 빠져나가면 바로 고부로 연결되는 곳으로 신라가 부흥백제를 공격하기 위한 최단거리의 길이다. 고부방면으로 가면 눌제가 닿고, 변산방면으로 가면 유정재를 지나 바로 주류성으로 갈 수 있는 곳이다. 전영래교수님은 줄포라는 지명도 원래는 주류포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만큼 지명이라는 것의 끈질긴 생명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추후에 줄포와 희안포 또는 제안포에 대해 글을 올리고자 한다.줄포와 고부 및 흥덕의 삼각지에는 동림제가 자리를 잡고 있는데, 동림제는 벽골제, 눌제와 함께 선사시대부터 중요한 저수지였다. 즉 백제시대 고사비성을 중심으로 한 호남지방의 3대 저수였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사실을 호남민들이 너무 모른다는 것이다. 줄포는 일제시대 호남의 대표적인 일본으로 쌀을 실어 나르던 항구였다. 아직도 곳곳에 일제시대의 건물들이 보이는 대표적인 호남의 항구였다.그러나 지금은 황량하기 그지 없는 곳으로 변하고 말았다.)
(줄포항은 이제 토사때문에 어항으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갈대만이 남아 그 역사의 현장을 지키고 있습니다. 일본의 금서룡씨는 이곳 줄포만을 중심으로 한 곳이 백강으로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주장이 결코 터무니없는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당연히 줄포만도 백강구의 그 현장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면 백강구해전에 패한 백제 32대 풍왕은 이곳 줄포를 통해 고구려로 도망을 갔으니까요. 또한 왜의 많은 수군들이 이곳을 통해서도 주류성으로 들어 갔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지금의 보안면 남포리까지 갯골을 통해 배의 왕래가 가능했으니까요. 남포를 지나면 바로 유정재이구요. 그리고 바로 부근에는 고려창자 도요지가 있었고, 유정재 아래로도 도요지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곳이 백제시대부터 자기를 굽던 곳으로 자원이 풍부했을 것입니다. 줄포를 통한 수산물과 소금, 부안과 고부지방의 풍부한 임산물과 농산물이 만나는 곳이 바로 남포였으니까요. 바로 아래 있는 고창 아산 용계리에서는 백제의 대표적인 자기인 삼족의 토기를 생산하던 도요지가 발견되었습니다.)
줄포만의 조수간만의 차도 위와 비슷하며, 보안면 남포리 일대의 해발고도도 영전저수지 이남은 2-3m정도이며, 그 상류인 외포까지 조수의 영향을 받았다.
위의 고부천과 두포천 및 제안천(유천천)에는 각각의 포구들이 있었다. 고부천은 영원면 수성마을이, 두포천은 상서면 고잔과 목포마을이, 제안천은 보안면 외포가 대표적이다. 상서면 고잔마을에는 ‘배맨 돌’ 즉 ‘배를 매는 돌’이 20년 전까지 고잔교 근처에 세워져 있었다가 경지정리를 하면서 없어지고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이 사진은 전라도 닷컴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일명 '배맷돌'이라 부르는 돌이지요. 이 돌에 배가 정박을 할 때 묶어 두던 것입니다. 현재 이 돌이 어디에 묻혀 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이곳 부안분들에 의하면 경지정리를 하면서 땅에 묻었다고 합니다. 우리 조금만이라도 역사인식이 있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 하천은 목포마을에 있는 도포천입니다. 이 뚝방 부근에서 위의 배맷돌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묻힌 곳도 추정은 가능하다고 합니다. 하루 속히 이런 문화재를 찾아 원래 자리에 돌려 놓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부안지방에서도 이것을 고증하실 분들이 점점 줄어 들고 있습니다. 시급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따스한 2009년 봄 제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훈석형님과 함께 백강지역을 돌아습니다. 마음이 많이 아프더군요. 이렇게까지 허무한 역사였는가? 좀 더 넓게 바라보는 역사인식이 필요함을 느꼈지요.)
백제와 고려시대 자기를 생산하던 대표적인 유천리도요지는 영전저수지 바로 옆 서쪽에 있으며, 바로 아래 고잔이라는 지명을 통해 도자기 유출 포구를 알 수 있다. 백강구전쟁 후 풍왕이 줄포만을 통해 배을 타고 고구려로 가는데 그가 배를 타고 출항한 포구는 남포리 외포마을로 추정되며, 희안시는 외포의 서쪽의 구장터이다.
(고창 아산면 운곡리의 백제시대 도요지입니다.고창군청자료)
서해바다 주변의 하천들이 대부분 감조하천들이기 때문에 상류까지 깊숙이 배가 왕래를 할 수 있었으며, 약 10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바다에서 밀려오는 퇴적물들이 쌓여 포구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줄포만의 경우를 후포 → 줄포 → 곰소 → 격포로 포구가 이동될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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