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의 고창(ドルメン高敞)

고창고인돌(중월리 고인돌)

백강 문정사랑 2009. 10. 10. 16:00

 얼마전 크게 보도된 고창 봉덕리 고분군에 대해 알거예요. 이곳은 고인돌의 세계 최다의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죽림리와 도산리 고인돌군에서 아주 근접한 곳에 위치에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한성 백제기의 마한문화 전통을 가진 분구묘인 봉덕리 고분에서 금동신발과 칠기로 만든 화살통 및 중국제 청자 등 다량의 유물을 출토되었지요. 고창은 마한시대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의 중심지였는데 그곳이 바로 이 주변이 아닐까 싶네요. 고창 봉덕리 1호분은 방대형(方臺形)으로 길이 72m, 너비 50m, 높이 7m 정도로 그 규모가 커서 작은 야산으로 보일 정도이고 고분의 구조나 4호에서 출토된 남조대의 청자연대를 감안하면 5세기 초엽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이 분구묘는 구릉의 말단부를 장방형 형태로 다듬은 후 그 위에 성토하여 분구를 조성하고, 상부에는 석실분 5기와 옹관묘 2기를 안치하고 있고, 석실분은 4호분은 다른 석실분이 횡혈식인 것과는 달리 수혈식으로 분구의 동남편에 치우쳐 있습니다. 4호 석실 내부 유물의 배치은 시신이 안치됐을 중앙 머리부분에서 청동제 대나무잎 모양의 장식, 귀걸이(耳飾) 2쌍과 곡옥 2점을 비롯한 다량의 옥, 칠기로 만든 화살통, 대도(大刀) 2점과 손칼(刀子), 금동제 신발 등이 발견되었지요. 
중국제 청자와 호, 국내 최초로 발견된 소호장식유공광구호 기대에 올려진 채 그 밑에는 은제 탁잔, 성시구와 등자를 비롯한 마구류와 철제 무기류, 개배 18점이 발견됐다고 합니다.
소호장식유공광구호는 일본 고분시대의 토기인 스에끼(須惠器)에서는 장식호(子持壺)라 불리는데 금번 고창에서 출토된 것은 이들 토기의 원류로서 한일 고대 문화교류의 한 단면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합니다.

이렇게 긴 서설을 쓴 것은 제가 2002년도 11월에 이곳을 답사하면서 의아해 했습니다. 고인돌을 저렇게 많이 축조할 수 있는 세력이 그후 어디로 사라졌을까? 갑자기 사라진 역사와 현재는 저를 매우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고창은 풍요로운 농토와 물, 그리고 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천혜의 지방입니다. 그런데 역사상 고창은 청동기시대 즉 고인돌시대 이후는 늘 변방이었는지 고민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2009년 고창군의 노력으로 대규모의 고분 유적을 발견하게 되어 역사의 연속상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 고분군 옆의 고인돌이 이 중월리 고인돌입니다. 이곳에서 마제석검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소유는 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마을 사람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마제석검과 화살촉 등이 나왔으니 확실한 유적지이지요.

앞의 산이 죽림리 고인돌의 성틀봉이고 하우스 위의 산이 바로 이번에 발굴된 봉덕리 유적지입니다.  

 

 

고인돌의 규모는 그리 크지는 않지만 한 개만 자리을 잡고 있어 고인돌을 이곳에 만든 그 당대인들의 풍수지리적 가치가 더해지는 고인돌입니다. 규모는 사진에 보면 작아 보이지만 그래도 상당히 크더군요. 거의 2m 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