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성과 방어체계
주류성은 변산의 서쪽 높은 산지를 등지고 내려 앉아 내륙의 평지를 내려다보는 형국이다. 주류성 전면은 상서들판이 넓게 개방되어 있기 때문에 서쪽보다는 동쪽의 방어선이 불리한 요소이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동쪽으로 두포천과 고부천 및 동진강의 지류들이 넓은 습지와 강을 이뤄 쉽사리 공격을 할 수 있는 지형은 아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해로를 통한 직접적인 공격을 감행해올 경우 그 방어는 아주 취약한 형태가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주류성을 방어하기 위한 전략은 먼저 기벌포(계화도) 주변에 해안 방어체계가 가장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는 것이다. 또한 신라군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방어하기 위해서는 신라의 직선로인 갈령도 방어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또한 눌제방면의 신라군으로부터의 공격을 막기 위한 방어체계의 구축이 필요하다.
백제군도 주류성의 취약한 지역의 방어를 위해 전략적으로 방어체계를 갖추었다. 특히 660년 7월 갑작스런 나당군의 공격을 경험한 백제군으로서는 두 번 다시 실수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주류성을 지키기 위한 백제군의 방어는 서쪽과 북쪽으로 겹겹이 산성을 배치하였다. 먼저 가장 가까운 두포천을 중심으로 구지리산성, 염창리산성, 수문리산성, 용화동산성, 반곡리산성, 부안진성 등의 성을 구축하였으며, 상류에는 사산산성, 소산리산성, 부곡리산성이 있다. 소산리산성(舟山)은 희안포(主乙浦)의 해로를 따라 올라오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유정재(호벌치)와 연계한 경계와 방어를 위한 산성을 구축하였으며, 희안포 포구의 방어를 위해 장동리산성을 구축하여 남쪽을 방비하였다.
동진강과 고부천이 만나는 백산산성은 해안으로부터 공격해오는 적군을 경계하고 방어하기 위한 해안방책지이다. 고부천(눌제)을 건너의 제2방어성으로는 금사동산성, 은선리산성, 두승산성, 고부진성 등이 주류성으로 접근하는 신라군을 방어하는 전초진지이다.
신라군이 주류성의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서 최단거리는 경주-거창-장수-진안-임실-정읍-부안 노선을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영호남의 분수계인 노령산지 고개를 넘으면 바로 동진강으로 연결된다. 그 상류인 태인(빈골양), 덕천, 옹동에도 여러 방어용 산성이 분포한다. 이러한 방어체계는 신라장군 품일이 주류성 앞의 두량이성(사산산성)을 36일 간이나 공격하였으나 함락을 시키지 못한 것은 백제군의 이러한 방어체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백제군의 방어체계는 육로와 해로의 나당군을 효율적으로 방어를 할 수 있었다. 백제군이 4년간이나 줄기차게 나당군과 처절한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계획적인 방어체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편 피성(김제 성산)은 백제군의 중요한 식량보급기지로서 역할을 하였다. 잠시 백제의 662년 12월에 주류성에서 왕성을 옮겼다가 북쪽의 은진이 함락 당하자 다음해 2월 다시 주류성으로 왕성을 천도했던 북쪽의 중요한 성이였다.
특히 주류성을 중심으로 한 백제의 방어체계는 백제 5방중의 하나인 고사비성(금사동산성)의 전략요충지로서의 체계를 빠르게 접목시킨 결과라 할 수 있다. 고사비성은 백제의 5방 중 금강 이남지방에서 가장 큰 고을의 행정중심지이자 식량과 물자가 가장 풍부한 곳이었다. 그래서 백제는 일찍이 고사비성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주변의 방어 체계를 구축해 놓았던 것이다. 고사비성을 방어하기 위한 방어체계는 바로 주류성 방어체계로 연계하여 신속하게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사비성의 주변은 삼국 중 가장 농업이 발달하여 가장 풍족한 곳이며, 동쪽으로는 노령산지의 풍부한 임산물을 쉽게 획득할 수 있으며, 서쪽으로는 희안포에서 소금을 비롯한 수산물의 획득이 쉬웠다. 또한 당시 최대의 도요지들이 서쪽에 있어 경제적으로 대단히 풍요로운 곳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군사경제적 중요성은 일찍이 고사비성을 백제의 최대의 전략적 요충지로 자리 잡게 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고사비성의 행정구역은 지금의 전주, 부안, 정읍, 고창, 익산 등을 망라한 지역이었다.
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의 대군을 효율적으로 방어를 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산성에 의존한 방어체계를 구축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백제군들도 알았기 때문에 이를 적절히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속하게 전쟁 물자를 보급하는 것인데, 산성들이 많으면 하나하나씩 산성들을 함락시키면서 갈 수 밖에 없는 체계였기 때문이다. 신속한 기동력을 갖춘 부대라 할지라도 보급품이 없이는 단 하루도 싸울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백제군이 구축한 방어체계가 나당군을 효과적으로 방어를 할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 백제가 멸망한 결정적 배경은 군사력의 열세보다는 바로 도침과 복신 및 풍왕의 내부분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부흥백제국의 명장인 도침과 복신의 어이없는 죽음을 알고 난 뒤 나당군이 바로 총공세를 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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