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강전쟁(白村江の戦い)

주류성과 방어 산성의 관계

백강 문정사랑 2009. 9. 3. 10:39

주류성과 방어 산성의 관계(최진성박사)

  주류성은 <위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변산반도의 높은 산지를 등지고 앉아 내륙의 평지와 해안을 함께 내려다보는 형세라서 조망이 탁월하였다. 또한 주류성은 외적으로부터 직접 공격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 외곽에 산성들이 겹겹이 위치하고 있다. 두포천 하구 주변의 구지리산성, 염창리산산성, 수문리산성, 용화동산성, 반곡리산성, 부안진성(상소산성) 등이, 그리고 동진강 하구의 백산성 등은 해안으로부터 접근하는 적들을 경계 및 차단하였기에 이들을 ‘해안 방어 산성’이라고 할 수 있다.

 

 

(부안군 동진면 반곡리산성입니다. 길게 뻗은 반곡리산성은 토성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이곳을 답사하면서 정말로 이곳은 방어적으로 유리한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언듯보면 낮은 해발고도와 석성으로 아무 것도 쌓아 놓지 않아 웃을지 모르는 산성이라 생각을 하실 겁입니다. 그런데 이곳을 답사해본 결과 과거 50년 전 주변은 완전히 습지와 갯골이 발달한 곳으로 쉽게 공격을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신라군처럼 육로를 따라 공격해온 부대가 이런 곳을 공격하기는 쉽지 않았겠지요. 그런다고 당수군이 배를 타고 대규모로 이런 작은 산성들을 하나하나 점령하기도 쉽지 않았을 터이구요. 왜냐면 밀물과 썰물의 때를 잘 맞춰야 하거든요. 함부로 공격하다가 물이 빠질 때 배가 갯벌에 빠졌을 터이니까요. 이곳에는 아직도 깨진 기와장과 그릇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한 어르신은 깨진 조작들을 한 곳에 모아두셨더군요.)     

 

그리고 고부천을 경계로 두포천변의 사산리(두량이 또는 도롱이)산성, 소산리산성, 부곡리산성 등은 물론, 고부천 건너편에는 금사동산성, 은선리토성, 고부진성, 두승산성 등이 내륙에서 접근하는 신라군들을 방어하였기에 이들을 ‘내륙 방어 산성’이라고 할 수 있다.

 

 

(백강구해전이 일어나기 전 가장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사산산성(두량이산성). 작은 산성이지만 주변이 모두 습지로 둘러 싸여 있어 천혜의 요새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산산성 뒤로는 주류성이 있고, 또한 지금은 위와 같이 저수지 속으로 수몰되어버린 조손샘이 늘 맑고 깨끗한 물을 공급하여 군사들의 식수난을 해결해 주었을 것이다. 반대로 신라군들은 물과 식량공급이 부족하여 40여일간을 공격하였으나 결국 두량이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후퇴하고 말았다. 이 전쟁의 패배로 신라의 태종무열왕은 화병으로 죽고 만다.)     

 

 또한 갈령도(현 칠보면 구절재) 고개를 넘어오는 신라군들을 막기 위해서는 태인 인근의 산성들에서 길목을 차단하였다(전, 1996). 이 가운데 주류성과 상소산성만 石城이고 나머지는 모두 土城이었다(서, 2007)

신라군들이 경주에서 출발하여 주류성까지 도달하는 최단거리로 경주 - 거창 - 장수 - 진안 - 임실 - 정읍 - 부안 노선을 추정할 수 있다. 특히, 험준한 노령산지를 넘어 마지막 고개인 갈령도를 넘으면 곧바로 동진강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 상류인 옹동면, 태인면(빈골량), 덕천면 등에도 역시 여러 방어용 산성들이 분포하였다. 이들을 ‘갈령도 방어 산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밖에도 노령산지를 통과하던 신라군들의 주요 이동로를 차단하기 위한 전략적 산성들이 존재하였다.

  해안과 내륙용 방어산성들의 분포 양상과 입지 조건들로 미루어 백제군들의 군사전략적인 면모를 살펴볼 수 있었다. 해안과 내륙에서 공격하는 나당연합군들을 대비하여 이중 삼중으로 산성들을 배치함으로써 주류성의 직접적인 공격을 차단하는 한편, 아군의 우세한 방어력을 바탕으로 역공을 하기에도 용이하였다. 그래서 신라의 품일 장군이 외곽의 여러 방어선들을 부수고 마지막 방어선인 두량이성(사산리산성)을 36일간이나 공격하였음에도 실패하고 돌아갔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노,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