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성(김제 성산) : 김제시 교동
피성은 김제시 교동에 있는 41m의 구릉성 산이나 백제시대에는 백제의 가장 중요한 경제적기반이였다. 김제 시내는 물론이고 만경평야와 진봉들, 고군산열도의 새만금지역까지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부흥백제국의 왕성으로 천도되었던 곳이다.
662년 12월 백제왕 풍왕과 신하 좌평 복신 등은 왜국 장군 狹井蓮, 朴市田來津과 의논하여, 방어전에는 유리하나, 토지가 척박하고 농잠 할 땅이 부족한 주류성에서, 삼한에서 기름진 곳으로 이름난 피성(避城)으로 왕성을 옮겨야 한다는 결정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朴市田來津만이 홀로 피성은 적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간언하였다. 여기서 풍왕과 복신 등이 왜의 장군들과 함께 왕성 재천도 문제를 토론했으며, 여기서 풍왕과 복신 등은 장기전을 의식한 식량조달문제를, 왜장은 전시의 방어문제를 중요시 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663年 2月 2日 백제의 남부 4개 지역이 신라군에게 점령당하자, 피성이 적에게 너무 가까이 위치하게 되어, 왕성은 다시 주류성으로 옮겼다.
(김제 교동에 자리를 잡고 있는 성산이다. 이곳은 낮은 구릉의 산이지만, 이곳이 100년 전에는 서울, 부산 다음으로 부자였던 곳이라 한다. 풍부한 물과 넓은 옥토, 그리고 김제벌판에 널려 있던 사금 등을 가진 김제는 당시에는 풍족함의 상징이었다. 김제 성산은 마지막 백제의 불꽃과도 같은 곳이었다. 한국에서 가장 기름져 풍부한 곡식이 있어 백제를 먹여살리던 곳이 바로 김제였다. 김제에는 삼한시대부터 벽골제라는 저수지를 축조하여 농업생산력이 높았으며, 만경강과 동진강이 김제의 좌우를 흘러 수상교통이 발달하여 생산된 농산물의 유통을 편리하게 해주던 곳이었다.)
한편 백제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근초고왕 당시, 왜의 전권대사로 백제인 木羅斤資와 沙沙奴跪이 왜병을 거느리고 신라를 격파하고, 경상도 서부지역의 7국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말머리를 돌려 탐라를 격파하여 제주도까지 백제의 영토를 확장시켰다. 이에 근초고왕과 왕자 貴須(후에 近仇首王)가 군사를 이끌고 가자 전라도의 比利(完山), 辟中(金堤), 布彌支(미정), 半古(羅州)의 四邑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이리하여 근초고왕과 귀수 부자, 荒田別, 목라근자 등이 주류성의 주류시에서 만남을 가졌다. 얼마 후 왜장 千熊長彦과 近肖古王은 먼저 백제 땅이 된 辟支山(김제 성산)올라 맹세를 하고, 또 古沙山(古阜)에 올라가 맹세를 하였다고 한다. 그때 근초고왕이 다음과 같이 맹세하였다. “만일 풀을 깔고 앉으면, 불에 탈 위험이 있다. 또 나무를 잡고 앉으면, 물에 흘러갈 위험이 있다. 고로 반석 위에서 맹세를 하면 영원히 썩지 않을 것이다. 금후 천추만세에 끊임없이 무궁할 것이다. 항상 西蕃이라 칭하여, 춘추에 조공하리라”라고 하였다는 기록이다.(神功皇后 49年 春 3月).
왜에 근초고왕이 고개를 숙여 왜에 감사를 드렸을지는 몰라도 백제는 당시 최고의 고도문화를 가진 선진국임을 생각해볼때 일본서기의 내용에 기록 된 것처럼 서번이라 함은 물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과 같은 기록일 것이다.
역사는 늘 살아남고 승리한자의 기록이라면 일본서기의 내용도 살아남은 열도 주신의 기록일 것이다. 반도에서 쫒겨간 반도의 부여인의 아픔의 기록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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