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강전쟁(白村江の戦い)

한국과 일본의 카르마(업)

백강 문정사랑 2010. 1. 12. 12:27

왜 그토록 한국인은 일본이라는 나라를 싫어할까? 그리고 일본인은 어떤가? 많은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속마음을 남에게 잘 보여주지 않지만 은연중에 한국인과 한국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음을 볼 수 있다. 이런 한국인과 일본인의 서로에 대한 카르마는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단지 일본의 한국침략으로만 해석하기 어려운 문제가 바로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카르마다. 한국인들이 생각할 때 일본이라는 나라는 한국을 침략했다는 이유로서 그 카르마를 설명하려한다. 한편 일본인이 가지는 한국인에 대한 카르마는 어떤가? 카르마는 한국말로 업(業)이라 한다. 업은 불교 용어로 미래에 선악의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이 된다는 사람의 모든 행위에 대한 선악의 소행을 말한다.

한국과 일본의 이러한 근본적인 카르마에 대한 시작은 어디서부터일까? 근대의 일본의 메이지유신 이후의 한일합방일까? 아님 조선시대의 일본의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일까? 고려시대 왜구의 침략일까? 이에 대해 고려조정의 대마도 정벌일까?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일본에 대한 카르마의 인식은 일본의 한국침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일본은 왜 그토록 한국을 침략하고 대륙을 침략하려고 할까? 우리 한국인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일본의 카르마는 뭘까?

한국인들이 일본을 미워하는 이유는 아마 일제40년, 임진정유왜란 7년, 고려시대 왜구의 침략일 것이다. 중세와 근대에 지속적으로 국내를 통일하고 군사력을 키운 일본의 한반도와 대륙침략에 그 원인을 두는 경향이 많은 것 같다. 또한 고대 한반도로부터 건너간 도래인들의 일본 사회에 준 획기적인 문화에 대한 감사를 모르는 것과 같은 일본에 대한 한국의 문화적 우월성을 말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한국이 일본에 얼마나 많은 것을 주었는데 일본은 왜 그것에 대해 고마움을 모르는가라고 항의하고 싶은 한국인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최근의 독도와 동해에 대한 문제, 그리고 일본의 역사교과서 등의 문제는 한국인이 일본을 싫어하는 반일감정을 가지고 일본에 대한 카르마를 가지는 내용이었다.   

특히 근대의 일본의 한국지배는 과거의 역사의 침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이다. 과거는 시간이 흐르면 잊혀지고 치유되기도 하지만 현재의 역사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각종 통신장비의 발달로 과거의 만행에 대한 기록들이 언어로 표현되던 것이 이제는 사진이나 영상의 기록으로 남아 더욱 치유가 쉽지 않게 만들고 서로에 대한 증오는 깊어만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일본이 저지른 만행은 어떠한 설명으로도 용서할 수 없고 반드시 사과와 보상이 뒤따라야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역사적으로 전쟁은 참혹함의 극치라는 점이다. 전쟁에는 인권이나 여성의 권리는 존재하지도 않고 승리를 위해서는 어떠한 행위도 무의식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근대의 전쟁은 무기의 발달로 더 참혹해지고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행위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일본의 731부대를 보더라도 그 행위가 과연 인간으로서 가능했을까 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잔혹했으나 일본을 점령한 미국은 이들의 생체실험보고서를 획득하고 그들에게 물질적으로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과연 의학적 군사적 실험용 인간의 인권과 명예 회복을 위해 누가 그들에게 사죄를 할 것인가. 전쟁이라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다. 전쟁이라는 것은 승리하기 위해 그 무엇도 할 수 있고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인은 왜 한국을 싫어할까? 그들은 한국을 그토록 많이 침략을 하고서도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더 한국을 미워할까? 일본인들이 한국을 싫어하는 이유를 각종 자료나 인터넷의 내용을 보면 감상적이며 구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역사인식의 결여된 내용을 많이 보게 된다. 이렇게 일본인들의 한국에 대한 카르마는 왠지 추상적이며 감상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렇게 사고하는 일본인들이 문제가 있다고 하기에는 일본인들의 한국에 대한 카르마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 일본인들의 무의식속에 잠재된 존재의식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 의식의 출발을 이해하지 않으면 영원히 한국과 일본의 서로에 대한 카르마는 해결 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인의 무의식에 잠재된 한국에 대한 혐오감은 아마도 한반도에서의 물러간 열도의 이주민들의 의식으로 보고 싶다. 신라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일본열도로 쫓겨 가야 했던 가야인들, 그리고 또 신라에 의해 쫓겨야 했던 백제인들의 카르마가 아닐까? 일본열도로 쫓겼던 가야인과 같이 역사적 동질성을 가진 일본열도 도래인들의 카르마.

신라의 창칼에 의해 철저하게 짓밟혀 눈물을 흘리며 조상들의 모든 유산과 가족 친구들 모든 것을 잃고 만 가야인들의 서러운 역사의 뒤안길을 가진 도래인인 오늘날의 일본인들의 역사적 한은 아닐까? 전쟁에서 패하고 살 터전을 잃어 그 거칠고 험난한 현해탄을 건너는 슬픈 도래인들의 깊고 깊은 한은 아닐까?

신라가 당을 끌어들여 한반도 남부를 평정함으로써 한일관계의 카르마는 더욱 분명하게 갈라지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그 우습던 신라에게 당한 치욕이 열도의 주신들에겐 더 큰 치욕이었는지 모른다. 반도의 형인 백제가 나당군의 기습공격으로 도성이 함락되자 왜는 신속하게 전쟁준비와 물자를 보내 백제를 지원한다. 4년간의 준비를 통해 왜는 당시 전 인구의 0.8%에 해당하는 4만2천의 대병을 백제로 보낸다. 그리고 이들은 4번에 걸친 해전에서 당수군에게 400여척의 배가 불에 타고 부서지는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고, 패전한 병사들은 다시 주류성을 중심으로 모여 10여일의 간의 처절한 대혈전을 벌인다. 그리고 663년 9월 7일 백제군 수뇌부와 왜군은 항복을 결의하고 항복하고 만다. 이 사실을 들은 백제의 난민들은 남해안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일본으로 거친 항해를 하면서 고향산천을 떠나야 했다.

당시 일본서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때 나라사람들이 서로 “주류가 항복하였다. 일을 어떻게 할 수 없다.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을 어찌 또 갈 수가 있겠는가. 다만 저례성에 가서 왜의 장군들과 만나 사건의 기밀한 바를 의논하자”라고 말하고 있다. -일본서기, 천지천황 2년 9월, 전용신역, 일지사-

백제인들도 가야인들처럼 전쟁에 패한 뒤 가족, 묘, 친구, 이웃, 땅, 재산 등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야 했다. 수십만의 행열이 끊임없이 일본으로 죽음의 항해를 하였고 일부는 배가 침몰하여 죽기도 하고 일부는 살아 일본에서 새로운 삶을 열어야 하는 절박하고 고된 항해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특히 고된 항해길이지만 일본으로 갈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일반 평민이 아니라 귀족이나 뭔가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안 되었을 것이다. 지배계층이 아닌 자들은 쉽사리 현해탄을 건너는 배에 오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반도에서 누릴 것을 누리며 살았던 지배계층들은 아마도 굶주림이나 반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간 당시의 대부분의 민중들보다 더 신라에 대한 복수심에 치를 떨었을 것이다.

그렇다. 663년 8월 26-27일의 백강전쟁과 9월 7일까지 주류성 앞의 장패평 전투는 열도주신과 반도주신을 완전히 갈라지게 한 계기가 된 것이다. 백제의 완전한 항복은 일본열도로 건너간 백제주신과 가야주신들에게는 위기이자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의미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정신없이 바빴다. 나라를 새로 건선하여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절실한 과제였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역사를 기술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바로 712년에 기록한 고사기와 720년에 완성된 일본서기이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국호도 제정하여 널리 알렸다. 그것이 바로 일본이라는 새로운 국가였다. 이 일본에는 기존의 야마토조정과 백제의 지배계층이 참여한 연립정권을 세우게 된 것이다. 일본이라는 국가는 정확하게 주류성이 함락되고 난 후 6년이 지난 670년의 일이었다. 백강전쟁에서 패한 왜조정에게 더 시급한 문제가 있었다. 나당군의 침공에 대비를 해야 했다. 그래서 백제 귀족인 억레복류에게 일본 곳곳에 성을 쌓게 하였던 것이다. 백강전쟁 1년 뒤인 664년 후쿠오카의 太宰府 水城을 축성하고 665년에는 大野城, 사가현(佐賀)현에 기이성(基肄城), 구마모토(熊本) 기꾸지성(鞠智城) 등을 축성하였다. 667년에는 나가사키현 대마도 가네타성(金田城), 나라현 다카야스성(高安城), 가카와(香川)현 야시마성(屋島城), 야마구치(山口)의 長門城등을 축조하였던 것이다. 이들 성은 백제 달솔 달본춘초(達本春初)가 長門성을 축성하고, 달솔 억례복류(憶禮福留)와 달솔 사비복부(四比福夫)가 大野城, 鞠智城과 基肄城 등을 각각 축조하였다.

당시 왜 조정의 다급함은 이러한 방어용 산성뿐만 아니라 수도를 내륙으로 천도를 하게 하였다. 그때가 백강전쟁 후 4년이 지난 667년 3월로 대신과 백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륙의 오오미(近江, 현 시가현 오오즈시)로 옮기게 되었다.

더 큰 변화는 일본어의 확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일본과 한국은 통역관이 필요하지 않았고 언어 자체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헤이안시대 일본은 한국처럼 한자를 차용해서 일본어를 옮기던 것을 버리고 자체적으로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문자의 확립은 더 이상 한국과 일본을 동질민족으로 볼 수 없게 만든 요소가 되었고, 한국과 일본의 골은 더 깊어만 가게 된 것이다.

반도에서 쫓겨난 열도주신들은 고토회복을 위한 준비를 꾸준히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반도에서 쫓겨난 90년이 지나 신공황후는 발해와 더불어 신라침공준비를 하였다. 결과적으로 발해의 반대로 신라를 정벌할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일본의 끊임없는 반도진출은 신공황후를 모신 규슈의 향추묘에 잘 남아 있다. 그녀는 “기필코 신라를 정벌하여 원한을 풀리라”   756년부터 일본은 치밀하게 신라를 침공할 준비 762년까지 진행하였다. 일본은 고구려출신의 고려대산이라는 인물을 견발해사로 임명하여 발해와 함께 신라를 협공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발해는 그에 대해 답변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일본이라는 나라는 결국 패망한 가야, 백제, 고구려의 지배계층들과 무엇인가 특권을 가진 계층이 망명 조합하여 이룩한 국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인 인류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최소한 90%이상은 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라고 한다. 이토록 반도주신에 대한 뿌리 깊은 원한은 바로 대륙과 반도에서 열도로 쫓기고 쫓겨서 남게 된 응어리는 아닐까? 이것이 바로 뭔지 모르게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는 한국과 일본의 카르마가 아닐까?

나비문명을 쓴 다카하시 마사아키씨도 그의 백제 카르마에서 “일본국의 성립은 신라와 일본이라는 두 개의 조선인 국가가 성립하고 바다를 사이에 두고 대립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도 마사아키씨와 같은 생각입니다. 더 넓게는 만주의 주신까지 포함하는 대주신들의 분열을 통해 아시아의 평화는 요원해지고 있는 것이겠지요.

전쟁에서 패배하여 쫓겨난 열도의 주신이 가지고 있는 열등감과 패배의식은 반도주신에 대한 적개심으로 커졌을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의 근본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반드시 백제의 멸망을 통한 열도주신의 감정을 이해하지 않고는 해결이 안 되리라 생각됩니다.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미움과 증오로 얼룩진 일본인에 대한 적대감은 단순하게 근대나 임진왜란 등으로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인 듯합니다. 현재의 남북한으로 갈라진 한반도의 문제와 한일간의 문제도 어쩌면 형제간의 관점이라는 공통점이 있기에 더욱 쉽게 풀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형제간의 싸움이 더 무섭다는 말도 있습니다. 한일문제 해결에 있어 무엇이 선후이고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로 1,000년에는 같은 피를 나눈 형제라는 사실이지요. 

저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반드신 백강전쟁의 이해가 한일문제 해결을 위한 첫 단추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긴 서설을 한 것도 백강문제의 이해 없이는 한국과 일본이 절대로 서로의 근본문제를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늘 강의하면서 학생들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한국의 동쪽에 있는 바다가 동해인가요? 일본해인가요?”

대부분의 학생들이 “동해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저는 다시 묻습니다. “일본에서 동해를 바라보면 동쪽인가요? 서쪽인가요?”

“서쪽입니다.” 

“그러면 일본에서는 동해라는 말이 틀리네요? 그렇지요?”

“음”

“동해가 일본해인가요?” 모든 학생들이 “아니요”라고 답합니다.

일본해라고 하면 한국인들은 꼭 일본에 속해있는 바다라는 생각이 들어 기분 나빠합니다.

그렇습니다. 서로가 공통으로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지명을 쓴다면 서로 싸울 일이 없겠지요.

저는 일본인 아내와 처음만나 결혼을 하여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고 있고 미래에도 이러한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저는 아이들이 셋이 있습니다. 딸 하나에 아들 둘이 있지요.

우리 아이들에게 있어 일본인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시고, 한국인 할머니가 계십니다.

아이들에게 “일본인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일본인이라서 싫지 않니?” 라고 묻으면

아이들은 “아니요”라고 말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있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한국인이다 일본인이다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아이들에게 있어 이분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일 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전쟁으로 죽어간 사람은 그 나라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인간이라는 것이고 나라라는 뭔지 모를 정치체계를 위해 희생한 희생양이라는 사실이지요.

국가가 국민에게 안전을 담보해준다지만 국가라는 존재들이 뭔가 서열을 만들고 힘을 몇몇에 집중시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은 아닐까요? 인간이기에 누구나 권력욕이나 물욕 등을 가진다 라고 말하지만 권력이나 물욕이 너무 앞서 우리 인간들의 삶을 짓밟아 버린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세상사가 그렇게 약육강식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렇게 받아들여야 한다면 저는 그렇게 말하는 분과 어떻게 논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다시 백강전쟁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저는 백강전쟁유적지를 찾아다니며 조사를 할 때가 많습니다. 어떤 곳을 가면 하루 종일 머리가 아프고 정말로 죽을 것 같은 체험을 하기고 합니다. 그런 곳은 여지없이 과거 묘지였던 곳이거나 전쟁으로 인한 피의 절규가 들리는 곳입니다. 한 번은 장패평 전투가 끝나고 원효대사와 의상대사, 그리고 사복스님이 죽은 시신을 거두어 묘를 만들어 주었다는 것을 갔습니다. 을씨년스러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저는 가만히 대지에 머리를 조아리고 그들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아픔과 고통으로 소리를 지르며 저의 몸을 짓누르기 시작을 했습니다. 한 10분간을 그렇게 그들의 소리를 듣고 나니 저의 몸은 이미 망신창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죽어간 그들은 한결같이 처참한 광경이었고, 가난한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저와 같은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당나라인도, 신라인도, 백제인도, 왜인도, 고구려인도 아닌 단지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인간이었습니다.  

저의 머리는 깨질 듯이 아프고 저의 어깨는 힘이 빠져 축 쳐졌습니다. 저는 운전을 할 수가 없어 잠시 차를 대고 몇 십 분을 쉬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모든 백강문화유적보존연구회원들에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어느 나라의 백성이 아닌 역사 앞의 허약한 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한국과 일본,

피는 물보다 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