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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부근리고인돌과 하짓날 기우제 Ganghwa Dolmen and Summer Rain Festival

고인돌 배치에 패턴이 있다고 난 말한다. 진짜냐고 묻지도 관심도 없다. 그리곤 논문심사에서 비웃는다. 이렇게 몇 년을 달려오니 빛이 보인다. 긴긴 어둠의 터널을 뚫고 나온 기분이랄까? 고인돌 하나하나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조금은 알기에 선사인들의 마음이 전해온다. 고창에서 300여기 이상 소군집 고인돌을 조사했다. 조사한 고인돌을 노트에 기록하고 정리하고의 반복된 일상을 세상에 널리 알린다. 오늘도 내일도 고인돌의 패턴의 의미를 나눔한다. 나의 연구방법이 어떤지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그저 고인돌은 무덤이고 선사인들은 우매하다. 갑작스런 고인돌의 천제와의 관계 해설은 엉뚱하다. 기존 한국 학계에 없는 접근방법이니 더 그렇다. 강화 부근리고인돌이나 도산리고인돌이 무덤인지 묻고 싶다. 알고 싶다. 왜 무덤인..

고창 쌍천 고인돌과 절기

3시간 동안 고창의 자연환경과 역사를 강의 후, 해지기 90분이라 쌍천마을의 고인돌이 부른다. 기산서원 근처 여름이면 찔레나무와 잡풀에 뒤덮여 잘 안보이는 고인돌이 있어 주변을 정리한다. 그제서야 굄돌도 보이고 실체가 제대로 보이니 이곳저곳을 살펴 고인돌의 방위각을 측정했다. 역시나 60°로 하짓날 일출지점을 향하고 있다. 쌍천마을 쪽으로 걸어가니 몇 기의 거대한 고인돌들이 일렬로 쭈욱 배열되어 있고, 민가 뒤로도 몇 기가 있어 고인돌 간의 방위들을 조사했다. 한 고인돌을 중심으로 동북쪽으로 4기의 고인돌이 60°인 하지 일출지점으로 향하고 있고, 위의 다른 고인돌과 연결하니 120°의 동짓날 라인이었다. 이 고인돌 측면으로 3기를 연결하니 100°의 춘분 추분의 라인이었다. 고인돌은 그 자체로도 절기를..

줄포항의 삼양사와 김경중

내 고향 줄포는 삼한의 마한 눌제가 있었고, 눌제는 호남의 어원이 되는 제방이자 저수지였다. 이후 백제시대 중방인 고사부리의 속현 흔량매현의 속지였으며, 남북국시대 보안현 속지이자 제안포라 불린 유서 깊은 곳이다. 고려시대에는 12조창의 하나인 안흥창의 주변이자 고려청자의 주산지 인근으로 고려 경제의 중추였다. 서해안 칠산어장의 법성포와 함께 전북의 군산보다 앞서 개항이 될 정도로 호남의 중심항이었다. 물론 1788년 인근 흥덕의 사진포도 안흥창과 함께 마포로 향하는 중요한 관선과 상선의 요충지로 줄포도 그에 못지 않은 항구였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정도 일제는 전북 서남부의 쌀을 수탈하기 위해 줄포와 오사카를 직항하는 항로를 개설하기도 했고, 그 혜택은 고스란히 줄포의 김성수일가에게 돌아갔다. 줄포자..

카테고리 없음 2022.03.15

부안 하서 구암리고인돌 절기와 천체의 시간을 담다.

부안군청의 도움으로 하서 구암리고인돌군의 배치를 받고 나니 조사할 마음에 가슴이 설랬다. 지난 1월 눈오는 날 조사한 후 정확한 방위각을 얻어 심층적으로 연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인돌과 고인돌을 선으로 연결해 방위각을 측정한 후 그 방위각이 어떤 천체현상을 담는지 조사했다. 고인돌의 절기는 동지, 하지, 춘추분의 보통 다른 지역에서도 나타나는 패턴들이었다. 근데 자세히 보면 각각의 절기들을 나타낸 고인돌 간의 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있다. 고인돌 간격들이 밤과 낮의 시간으로 표기했을 것으로 보고, 가운데 춘추분을 기준으로 계산했다. 즉, 춘추분의 밤낮 비율이 1:1이니 다른 것들도 이에 대비해 계산하고, 비율로 계산한 후 다시 그 비율을 시간으로 환산하였다. 지난번 고창 송암마을은 하지의 낮..

카테고리 없음 2022.03.13

농사의 시작과 풍년을 기원했던 정읍 정해 고인돌

정읍은 백제시대 정촌현이 있었고, 정촌현은 사방에 충적지가 발달해 물이 풍부해 농사짓기가 편했다. 그리고 영산기맥의 입암산 일대에서 내녀오는 좋은 물은 농업용수 뿐만 아니라 우물도 좋았을 게다. 정읍 정촌현의 정해에 살던 선사인들도 이런 좋은 입지조건을 갖춘 터전에 살면서 풍요로운 삶을 간구했을 것이고, 풍년을 기원했다. 정해 인근 반암마을처럼 충적지에 있는 고인돌이 가지는 방향의 패턴을 확인하고 싶어 찾아갔다. 그러나 3기의 고인돌들은 이미 자리가 이동해 원형을 잃은 지 오래되었다고 한다. 주인에게 물으니 발굴조사를 했는데 무덤방이 없이 그냥 돌위에 덮개돌을 올려 놓았을 뿐이라 하였다. 이런 고인돌들은 무덤이 아닌 제단이니 당연히 무덤방이 없는데도 일부 학자라는 분들은 끝까지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

고창 운곡리는 선사시대 우주의 중심!

청동기시대 고창 운곡리는 우주의 중심이었다. 세계 최대 고인돌인 운곡리고인돌은 북극성을 상징화한 것이고, 그 일대는 자미원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계획적으로 고인돌을 배치했다. 운곡리고인돌을 중심으로 주변의 고인돌들이 모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우연일까? 각각의 빨강선들은 모두 운곡리고인돌로 향해서 배치된 것이고, 약간은 오차는 이해하고 넘어가자. 빨강선의 중간 흰색원도 고인돌군이거나 고인돌을 표시한 것으로 선사인들이 이 일대를 중심으로 거대한 권력집단을 형성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특히 이곳 고인돌들의 배치는 예전부터 계속 주장한 선사인들의 삶과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흔적이다. 운곡리 깊은 골짜기는 천상의 자미원을 상징하고, 주변은 태미원과 천시원을 상징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고창천과 인천강은 하늘의 은하..

고인돌의 천체반영은 우연이 아닌 선사인들의 삶이었다.

고창군방범대장이셨던 봉덕마을의 전이장님은 나를 끌고 인근의 대나무밭으로 가신다. 그리고 누군가에 의해 움직였던 흔적의 고인돌 3기가 나란히 놓여 있다. 이들 고인돌은 반쯤 묻힌 상태여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없으나 예전에 놓여진 곳을 알려주신다. 그곳으로 가니 헐 죽림리고인돌 3코스와 운곡리 고인돌과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고인돌이다. 비록 몇m 이동해 본 모습은 잃어 버렸지만 그래도 이렇게 예전 위치를 확인하면 고인돌 간의 관계를 해석할 수 있는 조건은 되니 즐겁다. 이 봉덕리고인돌군은 춘분의 일출지점인 동쪽의 도산리고인돌을 바라보고 있어 주목된다. 고인돌의 이러한 배치가 절대로 우연이 아님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고인돌군이다. 연구를 하면 할 수록 고인돌을 축조하던 선사인들의 깊은 지혜와 노력에 감탄하..

고창 봉덕리고인돌의 동지와 하지

운전하다가 갑자기 아! 맞아 예전에 저기 고인돌이 있었지라는 생각이 들면 차를 돌린다. 어제는 봉덕리고인돌이 생각나 발길을 돌렸다. 그곳엔 1기의 기반식고인돌과 개석식고인돌 2기가 구릉 정상에 위치하고 있어 의미가 남다르다. 특히 5기 이내의 고인돌에는 몇 가지의 확연히 나타나는 패턴의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동지 일출을 향하는 120°로 장축이 놓인 것과 60°로 장축이 놓인 길다랗고 가느다란 고인돌은 역시 하짓날 일출방향이다. 고인돌의 형태가 일정하지 않아 엉 뭐지? 앞으로 가서보니 역시 덮개돌의 뾰족한 부분의 대각선 장축이 진북을 향해 놓여 있다. 대각선의 단축은 위의 60°고인돌과 거의 일치해 있는 것으로 보아 하짓날 일출선이고, 반대는 동짓날 일몰지점을 향한다. 열심히 조사하는데 한 분이 ..

고인돌시대의 삶의 흔적을 해석해본다.

이곳만은 오늘 꼭 해석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여러 기의 고인돌이 제각각 놓인 것처럼 보이나 절대로 규칙이나 생각없이 놓은 것이 아니다. 고인돌들은 그들의 생활상을 반영한 흔적이었다. 우선 부채꼴의 중심으로 두개의 고인돌과 와석으로 동서로 춘분과 추분의 일출일몰지점을 표현했다. 그리고 동쪽 끝에 와석으로 하지일출을 표시하고, 서쪽 끝에 동지일출의 작은 고인돌을 놓았다. 각각의 방위는 하지의 60°, 춘추분의 90°, 동지의 120°를 부채꼴로 표현한 선사인의 기교가 엿보인다. 하지는 A~C, 춘추분은 A~D, 동지는 B~E 구간이다. 이 구간이 의미하는 것이 뭔지 전하는 기록이 없어 정확하게 무엇이고 그들의 표현은 누구도 모른다. 다만 위에서 풀어본대로 천문학으로 우선은 절기를 해석하였고, 그 간격을 각..

선사인들은 고대 천문학자

유튜브를 보던 중 대한민국의 한 고고학자의 말에 나와 생각이 너무 달라 귀를 의심하며 들었다. 구석기인들은 미개인를 넘어 거의 원숭이와 비슷한 수준으로 현대인과는 차이가 많다는 이야기다. 최소한 1만년 전 신석기인들은 우리와 같은 호모 사피엔스인데 갑자기 구석기인들이 미개인이라니? 하긴 내가 그레이엄 헨콕의 책들이나 앤서니 애브니 등의 책을 읽다보니 그의 말에 충격을 받았나보다. 어떤 인류학자는 구석기인들의 평균 남성 신장을 역사상 가장 큰 170cm까지 보기도 한다. 구석기시대는 수렵과 채집 등으로 현대인들보다 단백질의 섭취가 훨씬 많고 노동시간도 일주일에 겨우 20시간 정도였기 때문에 키가 컸다는 것이다. 신석기시대 농업으로 인한 신석기혁명으로 인구가 급증하면서 인류는 탄수화물의 섭취가 많아지면서 신..